‘자기만의 방’이란 말을 두고 조금이라도 상상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어떤 의미들을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겠고 일반적으로는 그러는 편이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말 그대로의 ‘자기만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제는 육아용품 창고가 되어버린 저의 방 한가운데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군요. 늦은 시간이고 꽤 피곤하기도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제게 주어진 시간이 지금뿐이라면 할 일은 지금 해야만 하겠지요. 글을 쓰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글을 왜 써야만 하는 걸까요? 사실은 안 써도 됩니다. 이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기도 바쁜데 하루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나서 응당 휴식을 취해야 마땅할 시간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앉혀놓고 별로 찾는 이도 없는 네트워크 한구석의 작은 공간에 저의 편협한 사고들을 나열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렇게 되고 나니 제가 내일 피곤한 하루를 보내게 될 것만큼은 분명해졌군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데에는 일단 본래의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끄럽기만 한 일이 될는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 자신의 생각을 박제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마치 나이 들어가기만 하는 저의 생김을 사진으로 남기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고들을 글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의 저는 이렇게 생겨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육신과 생각. 그 두 가지가 다 저 자신이니까요. 대단할 것도 없는 삶의 한순간, 한순간을 기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보니 저는 아마도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꽤 기쁜가 봅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 축복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표현임과 동시에 저 자신에 대한 관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화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행동은 삶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물에 빠트린 솜사탕처럼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전에 적어 봅시다. 골머리를 앓다 보면 뭐라도 조금 더 명확해지겠지요. 아니면 응어리진 마음이라도 풀리던지. 어떠한 대단하게 여겨지는 일이라도 먼 미래에 보면 싱거워 웃음이 날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별것 아닌 사실과 경험들이 먼발치에서 보면 가장 빛나는 순간들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기록하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릴만합니다. 졸음을 참아가면서까지 말이죠.
갑작스럽지만 1900년대 초 영국 돈 500파운드가 현재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를 환산해 보았던 이야기를 잠깐 해 보아야겠군요.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야 할지에 대해 경제에 해박한 친구에게 자문을 구하려 했으나 친구가 갑작스러운 저의 질문으로 인해 곤란에 빠질 새도 없이 chat GPT 가 답을 알려 주었습니다. 현재 우리 돈으로 약 8000만 원 정도 되는 돈이더군요. 소박한 제 생각에는 이 정도면 한 사람이, 아니 평범한 한 가정이 1년을 살기에는 충분한 돈으로 보였습니다. 만약 일을 하지 않고도 이 정도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얻을 수만 있다면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최소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보장되는 하루 평균 한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쓸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말씀하신 대로 이런 때 글을 쓰는 것은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입니다. 결혼을 한 몸인 만큼 하루 종일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못한 아내와 시간을 보내는 일은 글을 쓰는 것보다 대부분의 경우에 훨씬 더 중요하지요. 게다가 저의 경우 이 블로그에 예약되어 있는 17개의 예약 발행 목록을 전혀 줄이지 못하고 있다 보니 하루 평균 한 시간의 자유를 그 이외에는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할애하지 못하고 있군요. 차라리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겠건만... 하지만 그러면 저는 절대로 저 예약 발행 목록의 숫자를 줄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chat GPT의 능력이 정말 인상적이군요. chat GPT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사실을 제가 도대체 어떤 수로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다소 섣부른 이야기일수 있지만 글쓰기의 자격을 놓고 이제 인간끼리 아웅다웅할 것이 아니고 인간과 ai가 자리를 나누어 가져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들이 오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저야 조금 회의적인 편이긴 합니다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쨌든 좋습니다. ai가 무엇을 하건 말건 어차피 글을 쓰는 우리가 결국 글을 써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돈도 있어야 하고요.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라도 아직 유명세를 얻지 못했다면 곡을 쓰고 음반을 만드는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서 낮에는 육체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특별할 것 없는 사실입니다. 작가건, 미술가건 마찬가지입니다. 밤늦게라도 자기만의 방으로 출근을 하기 위해 하루 종일 생선을 손질하거나, 공사장에서 자재를 나르거나, 배달 일도 마다하지 않지요. 모든 작업에는 당연히 돈이 드니까요.
저도 상속받은 유산은 없습니다. 일은 끊임없이 해야 하지요. 아기도 돌보아야 하고요.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저의 방은 하나 있군요. 저의 작은방에서 저는 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그림을 그렸고 악기 연습을 했으며, 나중에는 게임을 만들었고 이제는 글을 쓰고 있지요. 땅거미가 질 때, 슬로프를 따라 불이 켜진 산 중턱 스키장의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던 고향 저의 작은방에서 잔잔한 일본 노래들을 들으며 작업을 하던 짧은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날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땐 젊기도 했군요. 이쯤에서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 드리자면 훌륭하신 작가님께서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을 역설하신지 100여 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자기만의 방이란 것이 꽤 보편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통상적 사실이 그렇다는 이런 저의 견해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실 분은 아마도 그다지 없을 겁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제 조카들 모두 다 자기 방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또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기만의 방이 생기자 사람들은 자기의 방에 혼자 있는 것이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른바 화이트 노이즈라는 것을 찾아 혼자 있을 수 없는 곳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놀 거리들이 너무 많아진 반면 그런 유혹에 저항하는 인간의 힘이란 태곳적부터 여태껏 그대로이니까요. 그래서 모두들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는 중일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가급적 생각이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아이디어를 메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노트에 연필로 긴 글을 적기도 하지요. 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나 젖먹이 아기 곁을 지키던 새벽에도 같은 일을 했었군요. 방금 전에도 늦은 시간 pc 앞에 앉아 있는 저에게 아내가 다가와 객기 부리지 말고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 것을 촉구하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의 이런 무모함과 집요함으로 인해 아내에게도 그동안 제법 짭짤한 오락거리들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을요. 아무튼 몇 주나 미뤄둔 이 글을 저는 오늘 끝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내일 아침 눈이 제대로 떠지건 말건 그래야 다음 글을 시작하던지 아니면 한동안 그냥 맘 편히 빈둥대기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당연히 하던 일을 마쳐야 하고,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니까요. 작가님의 말대로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성별이나 재산을 핑계로 숨을 수는 없으니까요.
- 나는 마음이나 기질의 재능은 설탕과 버터처럼 무게를 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 한 성과 다른 성을 경쟁시키고, 한 자질을 다른 자질과 대립시키며, 우월함은 제 것이라 주장하고 열등함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이 모든 행위는 인간 존재의 단계로 보면 십 대 수준에 속하는 것입니다.
- 사람이 성숙해지면 편이나 교장이나 화려한 우승컵 같은 것을 더는 믿지 않습니다.
- 소설가에게 완전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독자에게 주는 확신입니다.
-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모든 문장, 모든 장면을 빛에 비춰봅니다. 매우 신기하게도 자연은 소설가의 완전성이나 불완전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내면의 빛을 우리에게 주었거든요. 어쩌면 자연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쓸려 보이지 않는 잉크로 우리 마음의 벽 위에 훌륭한 예술가만이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예감을 그려놓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 소설은 거미줄과 같아서 아주 약한 힘이라도 삶의 네 귀퉁이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 이 거미줄은 형체 없는 생명체가 공중에 자아낸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작품이며, 실재하는 것들, 건강과 돈과 우리가 사는 집 따위에 부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