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4장 (2003~2005)
#4. 영국 맨체스터에서
학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됐다. 주말에는 한인 교회에 나갔고, 그 후에는 함께 축구를 했다. 이렇게 보면 내 첫 유학생활은 축구에서 시작해 축구로 끝난 것 같기도 하다. 한인 교회에는 꼭 신앙 목적이 아니더라도, 한국 음식, 네트워킹 등 갖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글학교에도 꾸준히 나갔다. 대도시인만큼 맨체스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국에서 선생님이셨던 분들도 많았다. 감사하게도 그분들의 지도로 7차 교육과정 교과서에 따라 공부했다. 2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가야 하는 나로서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한국 교과과정을 착실히 따라갔다. 이모도 선생님으로 참여하여, 다른 학생들을 가르쳤다. 덕분에 학비가 면제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모는 의도적으로 동갑내기인 나와 종우 간 선의의 경쟁을 붙이셨다고 한다. 종우와 윤재형은 이모, 이모부가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이미 선행학습이 끝난 상황이었고, 나는 부모님이 맞벌이셨기 때문에 학원에서 주어진 것만 소화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1등이 1등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2등이 1등을 추월하는 게 더 쉽다고 했던가. 경제학에서는 이를 두고 '수렴 현상'이라고 하는데, 기존 어느정도 성장 궤도에 오른 국가보다 이제 막 자본축적을 시작한 국가가 더 빠르게 성장한다는 뜻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종우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어느새 단어시험을 쳐도 내가 더 많이 맞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고, 나는 신나서 더 열심히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는 종우가 이모 방에서 몇 시간째 나오지 않길래, 나중에 물어봤더니 이모가 안에서 따로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매일 저녁에 단어시험을 봤었는데(2년 동안 매일 봤었다), 나는 한 공간에서 단어를 암기하는 게 종우를 자극할까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달달 외웠다. 화전양면전술의 시작이었다. A4 용지를 세로로 반으로 두 번 접어, 왼쪽엔 단어를 쓰고 오른쪽엔 뜻을 썼다.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 타고 한 시간 거리였고, 나는 이모에게 방과 후 활동 후 늦게 집에 간다고 하고, 중간 지점에서 버스에서 내려, 단어를 외우며 집까지 걸어간 적도 많았다. 이모와 종우는 아직도 모르는 사실이다. 결국 나와 종우는 감정적으로 치달았고, 이 총성 없는 전쟁은 삶의 곳곳에 영향을 주었다. 키는 내가 더 컸었는데, 종우 또한 '수렴 현상'을 보이며 키가 쭉쭉 크고 있던 상태였다. 같이 살 2년 동안만이라도 종우가 날 따라잡지 않길 간절히 바랬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종우 밥이 더 많은 거 아니냐고 이모에게 간접적으로 시위한 적도 있었다. 지금 내 승부욕은 그때 길러진 듯하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된 선의의 경쟁은 둘의 실력을 모두 향상시켰다.
입학 후 5개월, 여전히 귀가 트이지 않았고 결국 슬럼프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집에 돌아와 짜증을 부리게 됐다. 말 수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차 안에서 이모가 그런 나를 보고는 "너도 사춘기가 온 모양이구나"하셨다. 사색을 즐겼고 한국 음악을 자주 찾게 되었다. 특히 감성적인 발라드를 좋아했는데, 그때는 수동 되감기가 되는 찍찍이라는 카세트 안에 테이프를 넣어 들었다. 차가운 잔디에 누워 노래를 들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한국이 그리웠고,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출국 당일 어머니께서 가족이 그리우면 하늘을 보라고 하셨다. 하늘은 다 이어져 있어서 내가 힘들고 외로우면, 어머니도 그걸 알고 하늘을 바라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가족 생각은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생각하게 되면, 남은 1년이 너무나도 긴 시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계를 자주 확인할수록 시간이 안 가는 것처럼, 다 와 갔을 때쯤 짠 하고 꺼내보고 싶었다. 다행히 중간에 온 식구가 영국으로 놀러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내 가족이 왔다며 우쭐대기도 했었고, 그동안의 고충을 다 털어놓으며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가기도 했다. 이모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미워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모, 이모부는 나를 나름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나를 공부시키셨고 동시에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셨다. 하지만 사춘기였던 나로서는 한계가 있었고, 그 모습을 매번 받아주는 두분도 쉽지 않았을 거다. 나는 해가 바뀌면서 눈치가 늘게 되었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네 식구가 화목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왠지 내가 방해하면 안 될 모습이어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 걸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항상 드라마를 봤었는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늘 한국에서 전화가 왔었다. 내가 전화를 하는 동안엔 드라마를 멈추고 다들 숨죽이며 식사를 했다. 내가 또 방해되는 거 같아서. 그런 게 나는 불편해서 일부러 전화를 빨리 끊었고, 괜찮은 척했다. 당시에는 엄마 목소리를 1초라도 더 듣고 싶어 했었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그때도 카카오톡이 있었다면, 모두가 나간 시간에 전화를 걸어 내 마음 다 보여주고 칭얼거렸을 텐데. UK Maths Challenge라는 영국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해서 금상을 수상한 적 있다. 자랑하고 싶어 학교 마치고 냅다 뛰어갔는데, 먼저 도착한 종우가 은상을 받았더란다. 집안은 축제 분위기였고 그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어렸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상장을 가장 찾기 어려운 구석진 곳에 숨겨뒀고 나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이모가 방청소를 하면서 내 상장을 발견했다. 나는 이미 지난 일이라며 웃어넘겼다. 선생님이셨던 이모는 그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국 학생들은 특이하게 원을 그려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당연히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뒤에 밀려나 어깨너머로 알아들으려 노력했다. 맨체스터에 도착하고 영어를 꾸준히 공부한 지 약 10개월 차, '귀가 트이다'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아는 단어들이 귀에 쏙쏙 들리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한 문장을 통째로 다 알아듣게 되었다. 꿈도 영어로 꾸게 되었다.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는데, 한국 친구들이 영어로 얘기하는가 하면, 영국 친구들이 한국말로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유수와 같이 빠르게 지나고, 나는 월반을 하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 내 나이의 학년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게 가장 컸고, 학교 측에서도 내 학습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정들었던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한 학년 높은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립학교 특성상 한 반에 15-20명(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 반에 40명 가까이 됐었다), 전교에 100명이 채 안됐기 때문에 오다가다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며, 두 집 살림(?)을 하게 됐다. 추억의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신애와 은서가 뒤바뀐 사실을 알게 되자, 은서가 화목한 가족을 떠나 궁핍한 가정의 친엄마에게 돌아간 비극적인 스토리처럼, 며칠은 갑자기 찾아온 삶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며 우울했던 걸로 기억한다. 마음은 이미 1년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게 있는데, 몸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었으니. Mark, Anthony, Josh와는 학교 밖에서도 자주 만났다. 결과적으로, 월반해서도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며 2년 동안의 회색빛 맨체스터 생활을 밝은 색으로 채워나갔다. 2005년 7월, 한국 축구의 심장,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해왔다. 동네 후배인 셈이다. 종종 올드 트래포드에 가서 직관하기도 했다.
마케팅, 브랜딩, 내 삶을 꿰뚫는 단어다. 어려서 수년 동안 다양한 인종과 문화 속에서 자라며, 언어부터 생김새까지 생소한 환경에서 생존 전략을 고민하며 버텼다.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치를 쌓았다. 그 결과,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가 어떤 포지셔닝을 해야 하는지, 어떤 언어와 온도로 소통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추후 이 고민들은, 누구와도 어떤 주제로 아이스브레이킹 할 수 있는 나의 커뮤니케이션 역량에 큰 밑거름이 됐다. 또한, 세상에 의문을 가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해소해왔다. ‘공부만 잘하는 한국인’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교내 축구부 주장으로서 팀을 대표했고, ‘소심한 동양인’ 편견을 깨고자 수업시간에 습관적으로 손을 들고 질문했다. 이렇듯 내 삶은 타인의 편견과 기성 틀 사이 틈을 찾아 이를 넓히고 탈출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때의 일기장을 보면, 공부보다는 외로움을 견디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내 기억 또한 왜곡되고 미화되어, 외로운 건 없었다고 줄곧 말해왔었지만, 돌아보니 그게 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외로움이었더라. 그리고 이제서야 인정할 수 있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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