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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형 Jun 30. 2020

08. 2막 6장 <나의 얘기>

2막 6장 (2005-2008)


#2. 고등학교 입학


남자들의 거친 세계에 입문했다. 남고에는 기싸움이라는 게 있었고, 이미 입학 전에 주요 인물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영화 <바람>처럼 스릴 넘치는 학원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주먹으로 지역을 평정한 울산 '통'부터 울산 메시, ○○동 호날두 등 별명이 따라붙는 소위 네임드 축구 괴물들이 집합한다고 들었다. 전자에는 관심 없었고 후자와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유치하고 창피하지만, 그 당시에는 로스트 출신이라는 게 축구계(?)에서는 하나의 명패로 활용됐는데, 각기 다른 중학교 출신 친구들 중 누가 축구 헤게모니를 잡는지가 중요했다. 나는 팀을 따로 만들고 싶어 재야의 고수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친구들은 이미 소속팀이 있었다. 결과적으론 당시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가장 큰 축구팀에 합류했다. 웃기지만 그때 주장 선배가 제안한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등번호 선택권이었고, 둘째는 1학년 팀 주장이었다. 파격대우였던 것이다.


좋은 벗들을 많이 사귀었다. 유난히 우리 반 아이들이 순수하고 온순했던 것 같다. 일단 서열 싸움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미국 유학생 명종이와 3년 연속으로 같은 반에 배치되었다. 중학교 2학년,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명종이는 늘 맨 앞 줄에서 수업을 듣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의지와 실천은 부족했었던 것 같다. '노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내 고등학교 입학 다짐이었다.


축구 동아리 외에 다른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봉사 동아리, 팝송 동아리 등을 가장한 친목 동아리였는데, 다른 학교 여학생들과 일종의 미팅 같은 걸 했다.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일진 모임은 당연히 아니었다. 당시 옆에 여고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고, 전날 시내에 나가 옷을 샀다. 당시 두발 자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3cm 반삭 머리에는 촌뜨기마냥 뭐든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돌아보면 매우 창피한 기억이다. 당시 학교에서는 그런 모임을 '불건전' 모임이라 규정하여 단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레이더에 포착됐고 참석 인원 모두 징계를 받게 됐다. 입학한 지 불과 한 달 후의 일이다. 당시 순재의 친형 순민이형은 전교 1등으로, 교내에서 권위자였는데, 내가 의자를 들고 벌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여기서 뭐하냐? 정신 차려라" 한심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순민이형이랑은 초등학교 때 순재랑 같이 피시방도 다니고 커서도 순재 집에 가면 종종 같이 놀기도 했다. 이렇게 최대한 튀지 않고 학업에 열중해야겠다는 나의 계획은 한 달 만에 무산됐다. 그래도 학기 내내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했고 교내 토익 경진대회에서도 980점으로 2위에 입상하는 등, 주어진 것에는 열심히 했다. 유학생 출신으로서 1등이 아니란 점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다.


당시 가장 이해할 수 없던 것이 두발 규제와 야자(야간자율학습)였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특히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탄생하고 발전한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나는, 더욱 적응이 어려웠다. 순탄한 단체생활과 학생의 원활한 관리라는 비겁한 명분 아래, 신체의 자유를 억압당했다. 규정을 어기면 어김없이 엎드려뻗쳐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남고여서, 분위기는 더욱 삭막했다. 지방이어서 더 그랬는지, 아니면 이것이 전국적인 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일례로, 복도에서 3학년 선배가 1학년 후배를 혼내고 있더라도, 이를 그냥 지나치는 선생님도 여럿 있었다. 짧은 머리의 학생은 단정하고 긴 머리의 학생은 불량한 것이라면, 일진이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면 모범생이 되고 모범생이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하면 양아치가 되는 것인가? 한 번 대들었다가 3cm였던 머리가 1cm로 짧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인문계고가 아니라 해리포터 마법학교인줄 알았다. 그런데, 확실히 외모가 강제 포기되니, 여자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긴 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야자도 문제였다. 학생이 원치 않음에도 정규 교육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야자를 강제했다. 오후 6시에 마치면 10시까지 강제로 학교에서 공부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 헌법상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심지어 형법상의 감금죄에 해당할 소지도 있다고 봤다. 영국에서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명백한 인권 침해이며, 자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당연시되던 사회 분위기였다. 1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야자, 두발 규제는 사라졌다. 그 강제적인 억압이 잘못 됐고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걸 모두 깨우쳤을 거다.


자꾸 축구 얘기가 나오는데, 나도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축구라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큰 부분이라는 걸 재확인하게 됐다. 고등학교 축구대회에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사고를 당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한 달간 입원을 하고 통깁스를 했다. 당연히 목발도 짚었다. 당시 학교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등하굣길이 고통이었다. 비극은 또 있었다.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는데, 돌아오는 유람선 안에서 베개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취침시간에는 보조기를 풀고 잤는데, 반사적으로 방어를 하느라 발을 잘못 디뎠고 '뚝'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 밑에서 무언가 말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직감적으로 X됐다는 걸 느꼈다. 돌아오는 날이 보조기를 푸는 날이었는데, 그 고통의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후회와 상실감이 몰려왔다. 사실 그것보다 아버지의 반응이 너무 두려웠는데, 울산에 도착하여 울면서 어머니께 먼저 전화드렸다. 당일 오후 6시에 바로 재수술 일정이 잡혔고, 수술 후 아버지는 나를 엄청 나무라셨다. 옆 여고에 짝사랑하던 누나가 있었는데 병문안을 와주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예뻤고, 그게 마음의 위로였다 (훗날 둘다 성인이 되어서 몇번 데이트를 했는데,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한 동안 학교에 나가질 못했고 시험공부는 병실에서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적은 평소보다 더 잘 받았다. 아버지를 실망시킨 대가로, 열심히 해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아버지는 내 진로에 대해 자주 여쭤보셨다.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고, 학교 생활은 어떤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고,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때까지만 해도 많이 엄격하셔서 긴장하며 대답했다. 지금은 친구 같은 관계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많이 무서웠다. 다시 영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 질문도 하셨고 예전 유학 경험을 살려 영국에서 대학 진학도 고려해보자고 하셨다. 강점인 영어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하셨다. 맨체스터에서 친분을 맺었던 형, 누나들에게 고민을 얘기하고, 주변 멘토들과 상담하고, 장고 끝에 마음을 정했다. 세계적인 명문대학교에 입학한 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 자극을 받으니,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졌다. 가슴이 뛰고 목표가 생겼다. 언젠간 다시 가야지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앞당겨진 것일 뿐이었다.


한번 해봤기 때문에 준비과정이 너무나 매끄러웠다. 한국 와서도 종종 안부를 묻고 지냈던 Anthony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고 같이 살아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월세를 따로 내기로 하고 생활비는 내가 따로 한국에서 받아 쓰기로 했다. 학교에 전화해 재입학을 희망한다는 얘기를 했고, 다음 날 필요한 서류 리스트를 보내주었다. 비자를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Mark와 Anthony는 전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대부분의 친구들과 선생님들 또한 그대로 있다고 했다. 새로운 적응은 크게 필요 없어 보였다. 사립학교의 장점이랄까. Mark, Anthony의 집은 방이 10개 정도 되는 대주택이었는데, 그중 개인 샤워실이 달린 방을 준비해뒀다고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친구들을 좋아해서 유난을 많이 떨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작별인사 영상도 만들고 가서도 곱씹어볼 수 있는 친구들 사진 폴더도 만들었다. 그때부터 관종끼가 있었는지, 혹은 영국에서의 외로움을 이런 식으로 보상 받으려는 심리였는지,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 컨셉으로 날 포장했던 것 같다. 이별, 유학, 영국, 공항, 비행기.. 그렇고 보니 모두 다 아련함이 묻어있는 단어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로, 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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