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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형 Jul 01. 2020

09. 2막 7장 <나의 얘기>

2막 7장 (2008~2011)


#1. 다시 돌아온 맨체스터


첫 유학 때와는 다르게 동행 직원 없이 혼자 비행했다.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생에 첫 흑인도 없었다. 물론 있었어도 상관없었을 터. 누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순재가 인천공항까지 배웅 나왔고 나머지 친구들은 울산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물론 그때도 미성년자였지만, 한번 해본 거라고, 조금 컸다고, 2008년 사진 속 표정은 2003년 사진 속 표정보다 훨씬 밝다. 다만 보조기를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움직임이 조금 불편했다. 비행기 안에서 학교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을 검토했고 단계별로 해야 할 일들을 숙지했다. 비행기 내부를 둘러보면서 다들 무슨 이유로 영국행 비행기에 탔을까 궁금해졌다. 슬슬 따분해지자 가족, 친구들이 써준 편지를 읽었다. 코 끝이 찡했다. 하지만, 약해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Welcome back", 맨체스터 공항에 도착하니, 장신 두 명이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Mark였는지 Anthony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인 Lee가 운전해서 함께 마중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 Diane이 두 팔 벌려 환영했고 처음 보는 샴 고양이(Woodie & Bamba) 두 마리, 보더콜리 강아지(Sparky) 한 마리도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방에 짐을 풀고 간단한 근황 캐치업 후 일찍 잠에 들었다.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오랜 비행 동안 차곡히 쌓인 잡념과 감정을 혼자서 처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가 잠들기 전 마지막, 일어나서 처음 든 생각었다.


정식으로 학교 가기 전, Diane과 함께 학교에 들렸다. 첫 유학 후 울산에 한 중학교로 전학 간 첫날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친구들이 "Oh my God, guess who is back"하며 반겨주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등록을 마친 후,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지금쯤 키가 180cm는 될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라며 말문을 텄다. 초등학교 때는 내가 친구들에 비해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영국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런 거 같아요" 여유 있게 너스레를 떨었다. 반 배정과 레벨 테스트를 위해 간단한 시험을 쳤다. 다행히 영어, 수학 모두 우등반에 배치됐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셨던 Mr. Brown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왼발 보조기를 보며 "축구는 당분간 못하겠구나" 하셨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영국에서는 A Level(영국대학입학시험)을 치기 전 중등교육과정에 해당하는 GCSE 시험을 봐야 한다. 하지만 한국과 영국을 오가면서 자격요건이 일부 불충족 되었고, 3월에 학기가 시작하는 한국과 달리 9월에 학기가 시작하는 영국 학제 특성상, 한 학년 밑에서 GCSE를 1년 동안 압축적으로 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맨 처음 축구캠프에서 친해진 친구들의 학년에 편입하게 된 것이다(Mark, Anthony, Josh 등이 있는 학년. 참고로, Josh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후였다). 영국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한 학년 위 친구들과 더 친해져 있었고 나이도 맞아서 공감대 형성이 잘 됐었기 때문에 이 점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어쩌겠는가, 그 친구들은 이미 시험을 치르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친구들의 졸업을 축하해주면서도, 마음 한편엔 씁쓸한 감정이 자리 잡았다. "나도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또다시 <가을동화> 은서가 된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 영국은 춥고 외로웠다.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친했던 친구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친했다고 생각한 그 친구들도 처음에는 반가워하다가 본인들도 갈 사람 남을 사람 구분이 명확해졌는지, 끝에는 소원해졌다. 아무래도 같은 반이 아니었고 졸업 준비로 바빴을 테다. 식어가는 관계를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게다가 한 학년 밑 친구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살갑게 맞아주지는 않았다. 새로운 학생들도 전학 왔고 이미 그들만의 관계도가 형성된 후였기 때문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그들의 유치한 사고방식. 내가 나이도 더 많았고 머리가 더 커서 온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식 유머라든지, 나에게 장난 걸어오는 것에 인색했다. 그런데 영국식 유머는 지금도 나와 맞지 않는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던 Mark, Anthony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둘도 머리가 컸기 때문에 나를 예전처럼 단순히 친한 친구보다는 친한 '한국인' 친구로 대하는 느낌이었다. 내 피해의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느꼈다. 물론 지금은 셋만 공유하는 끈끈함이 있다.


결정적으로 나의 주 무기인 축구도 아킬레스건 파열로 하지 못하게 되어, 슬럼프는 더 깊어만 갔다. 왜 운동선수들이 부상당하면 슬럼프가 오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Assembly(조례)에서 내 이름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친구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면 씁쓸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 점심시간에 보조기를 착용한 상태로 축구를 했다. 축구라기보다는 가만히 서서 공이 오면 서서 패스를 찔러주는 정도가 다였다. 그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때는 될 대로 돼라는 이판사판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치면 다치는 대로 한국에 가면 되고, 안다 치면 이렇게라도 친구들이랑 친해질 수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누나에게 고민을 털어놨었는데, 누나는 정 힘들면 돌아오라는 입장이었다. 계속되는 향수병에 당시 상황보다 훨씬 더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지친 심신을 위로받으려 했었다. 결국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조금 더 버텨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견뎌보라고 하셨다. 추측이지만,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한숨도 못 주무셨을 거라 생각한다. 이렇듯, 나의 두 번째 유학기는 외로움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외로움, 참 주관적인 병이다. 멀쩡하다가도 누가 옆에서 외롭지 않냐고 시동 걸면 한순간에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는 그런 병. 당시 한낱 외강내유 고등학생에게는 벅찬 것이었다. 이제는 외로움 위에서 갖고 놀지만, 당시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스치고 스쳐갔다.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혼자 삭히고 삭히며, 마음의 굳은살은 더욱 단단해져 갔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던 내가, 평범하다 못해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한국이 더 그리웠다. 익숙한 동네, 학원 마치고 먹던 분식, 24시간 편의점, 엄마표 두루치기, 허름한 뒷고기집.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수백 가지 이유를 만들어내고 떠올리며 하루에도 연옥을 수천번 수만 번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맛봤다. 그러면서도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오기였다. 이걸 견뎌내지 못하면 '낙오자', '패배자' 낙인이 찍힐 거라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한국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떳떳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이를 악물고 악착 같이 버텼다. 강한 압박 속에 힘든 일을 견디는 맷집과 지구력은 이때 길러진 것 같다. 요즘은 오히려 '문제'라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문제가 생기면 이를 진단하고 그에 적합한 해결 방안을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고 결과까지 모니터링하는 문제 해결 과정이, 어쩌면 내가 전략, 마케팅, 컨설팅 커리어를 쌓아오고 추구하는 것과 평행된 것 같다.


당시 내 유일한 낙은 한국 친구들과의 소통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자러 간다는 친구의 말에 괜히 섭섭하고 아쉬운 감정이 몰려왔다. 그 친구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괜히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도피를 가능케하는 진통제를 위해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미니홈피로 친구들의 근황을 확인하고 즐거워 보이는 단체사진을 보면 참을 수 없이 부러웠다. 외롭고 힘든, 그렇다고 누구에게 쉬이 털어낼 수 없는, 유학생활을 보내며 나도 모르게 안정에 대한 결핍이 생겼고 이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내 성격과 자아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후반에는 일종의 배신감까지 들면서 내 오기는 더 강하게 발동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보조기를 풀고 운동을 다시 시작하며, 내 모습을 찾아가면서 대부분 해소됐다. 건강의 중요성을 절감한 계기였다. 이때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담론에 대해 관심이 많이 생겼고, 여러 논문과 서적으로 이론지식을 쌓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탐구하고 관찰하며 나만의 '인간론'을 만들어 나갔다. 


다른 얘기로, 나는 어려서부터 사고파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 여행에 다녀온 Mark와 Anthony는 미국에는 포도맛 환타가 있는데 영국에는 없다고 불평했다. 대체품으로 웰치스가 있었지만, 그 맛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검색해보니 판매하는 곳도 있었지만,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었다. 영국의 학교 점심시간에는 한국과 다르게 대부분 샌드위치, 과자 한 봉지, 음료 이렇게 한 세트로 직접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다. 



카페테리아도 있었지만 맛도 별로고 비싸기만 했다. 거기서 한국 과자의 수요를 발견했다. 영국 과자들은 대부분 크기가 작았는데, 한국 과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양도 많았다. 일단 봉지 자체가 커서 시각적으로 압도할 수 있었다. 누나에게 전화해 시험 삼아 포도맛 환타와 한국에서 인기 있는 과자 수십봉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일주일 안에 도착했고 나는 이를 학교 캐비넷 안에 넣어두고 친구들에게 판매했다. 호기심으로 한둘 사기 시작했고, 금방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교생들이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재고에 따라 바나나킥+새콤달콤+포도맛 환타 = 12,000원 이런 식으로 묶음 판매했다. 용돈이 많았을 거라 짐작되는 사립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가격보다는 새로운 경험, 자랑거리, 으스대기 이런 것들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곧 학교에서 알게 됐고 노점상을 철거하는 구청 공무원처럼 내 캐비넷을 수색했다. 교내에서 금전적 거래는 불허하여 내 생에 첫 사업은 그렇게 종료됐다.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고 생각했지만 운송비용, 구매비용 등 비용과 수익을 따져보니 사실 그렇게 큰 이윤은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 해외 비즈니스는 두 가지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첫째, 실제로 첫 사업을 18살에 시작해봤고(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업이긴 했다), 둘째 이걸 계기로 내가 친구들을 찾아가는 게 아닌,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게 만들었다. 사실, 수요를 포착했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또 관종끼가 발동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살의 나이에 최초로..",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이런 무용담이 많았는데, 나도 그런 자전적인 스토리를 하나 만들고 싶었나 보다. 18살의 나이에 처음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며.


더 이상 한국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샴페인은 나중에 터뜨려도 충분하다는 마음을 되뇌고 되뇌었다. 이 과정이 다 지난 후에 내가 얻을 수 있는 달콤한 보상에만 집중했다. 학교 친구들과 오버해서라도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학교 성적에도 더 욕심을 냈다. 방과 후에도 밖에서 친구들과 만나 어울렸고 그날 배운건 그날 복습했다. 여유가 있을 땐 예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부모님은 몰라야 했다. 이 힘듦을. 나중에 소기의 목표를 이룬 후, 나 그땐 정말 힘들었노라 칭얼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몰라야 했다. 대신, 하늘에 대고 줄곧 말했다. 하늘은 알고 계시죠? 제 피땀 눈물.


또 한 번의 적응기간을 호되게 보내고 좋은 성적으로 GCSE를 수료하게 됐다. 전 과정을 1년 만에 끝낸 것치고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칭찬을 받았다. 고등학교 입학허가를 받고 여름방학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불안정한 아이에서, 여러 감정들에 대한 맷집을 키우며, 속이 단단한 아이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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