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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Feb 04. 2024

어떤 만남

병원 검사차 상경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세종문화회관 뒤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실 분들은 아버지의 사촌 동생과 지인으로 두 분 다 서울에 거주하시고, 여든을 훌쩍 넘긴 연령대이시다. 사실 그분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한 분은 친척 아재이시고, 다른 한 분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P선생님이시다. 나는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는 입장이지만 내심 P선생님을 오랜만에 뵙는 반가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P선생님과의 인연은 20대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선생님은 서울 시청에 근무하셨는데 어느 날 나를 좀 보자고 하셨다. 시청 부근에서 처음 뵌 선생님 인상은 아주 인자하신 미남자였다.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가 더 그러했다. 그때 선생님은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알탕을 사주셨다. 


일식집 스탠딩 의자에 앉아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입이 짧은 아가씨 입맛에 그 음식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뜨겁고 조금 징그럽게 생긴 알 주머니를 여느 아저씨들처럼 성심껏 먹지 못했다. 첫 만남에 선생님께선 '내 목소리가 아주 듣기 좋다'는 칭찬을 해주셨다. 


태어나서 타인으로부터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좋다는 얘긴 더더욱 처음이었다. 나는 그런 소리 처음 듣는다면서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말씀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선 맞선을 주선해 주셨다. 

그 남자와는 단 두 번의 만남에 그쳤다. 선생님을 두 번째로 만난 건 선생님 자택에서였다. 선생님이 놀러 오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근사한 멜빵바지를 입고 마중 나오신 선생님이 무척 멋지게 보였었다. 그날 저녁 사모님께서 차려주신 노란 카레를 맛있게 먹었었다. 


그로부터 몇 번의 만남을 끝으로 실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지하철과 연결된 지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인자하신 예전 모습은 그대로인데 못 뵌 세월만큼 허리가 굽으셨다. 반가이 뛰어가서 인사드리고 선생님의 손을 잡아드렸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아버지와 선생님이 말씀을 나누는 사이 친척 아재도 합류하셨다. 

세 분이 잘 만나셨으니 나는 자리를 피해 인사동으로 내뺄 궁리를 하였는데 선생님께 금방 들켜버렸다. 어디 갈 생각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신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샤부샤부 식당에서 뜨거운 스팀 사우나를 얼굴에 적시게 되었다. 


P선생님과 친척 아재도 고향 선후배 사이로 세 분이서 이렇게 만남을 갖는 이 시간은 아마도 생명이 허락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허연 수증기가 냄비에서 연신 피어오르는 탁자를 마주하고 식사에 열중하는 세 분의 모습은 경건하였다. 마지막을 기념하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자리 같았다. 쇠약해진 육신 지팡이에 의존한 채 귀한 걸음 내디딘 귀한 만남. 그분들의 눈빛만은 평온한 젊음이 충만하였다. 


세 분의 노신사들을 위한 커피는 내가 샀다. 그리고 사진도 찍어드렸다. 

선생님은 인생 잠깐이라며,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당부하셨다. 헤어질 때 그분들의 작별 인사는 담담했다. 아무도 마지막을 언급하지 않았다. 서운함이라든가 슬픈 감정은 이분들의 심경 밖으로 퇴출된 지 오래, 서로의 건강을 기원할 뿐이었다. 바람처럼 가벼이 돌아서는 P선생님의 뒷모습에서 인생을 통달한 철학자의 면모가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발걸음도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갤러리에 담긴 P선생님의 모습을 확대해서 다시 보았다. 직접 만났을 때는 몰랐던 이미지들이 숨은 그림처럼 나타났다. 선생님은 빨간 지팡이를 짚고 계셨고, 레몬색 운동화 끈을 매고 계셨다. 여름 바다를 닮은 다크 블루 셔츠에 체크무늬 재킷, 베이지색 모자까지 놀라운 패션 감각을 발휘하신 P선생님! 여전히 멋쟁이셨다.



_2018년 7월


책이 출간되자마자 P선생님이 생각났다.

전에 시집을 부쳐드렸을 때도 잘 받았다며 좋은 재능을 가졌다고 칭찬해 주셨던 분이다.

2020년 사춘기 딸과 지루한 냉전이 이어지면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물이나 상황에는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 속이 있으면 겉이 있다."

아이는 앞모습만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었고 엄마인 나는 뒷모습이 중요함을 얘기했다.

겉모습이 전부인 줄 알고 핏대를 세우는 아이에게 속 알맹이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맨날 양극단을 오가는 널뛰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나이 때 아이의 단편적인 시각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게 이런 어른이 계심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다음 해 설을 지나고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참 좋아하셨다.

내가 공들여 쓴 책을 누구보다 좋아해 주실 어른 P선생님!

지난해부터 연락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참이라 안부가 걱정되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코로나 광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재작년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최근 듣게 되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 같다.

조문도 하지 못한 먹먹함이 뒤늦게 가슴을 친다.

나를 아껴주는 어른 한 분을 잃은 심경이 빈 들녘 찬 바람이 불듯 헛헛하다.

나는 과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혈연을 떠나서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오는 누군가를 아껴주고 용기를 북돋우게 하는 그런 어른 말이다.

끝내 P선생님께 부치지 못한 책 한 권을 내려다보며 우편 봉투에 담아 보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온기를 실은 인연이었는지 깨닫는다. 

선생님, 어찌 부고도 없이 그토록 황망하게 떠나셨습니까?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님 영정 사진 앞에 서서 향불이 사그라드는 작별의 시간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가셨나요? 선생님은 벌써 떠나시고 없는 그간 부재의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제 인생길에 언뜻언뜻 나타나셔서 좋은 향기를 주시고 가르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타이틀 사진은 지난달 집에서 꽃 피운 만리향입니다. 저 홀로 만 리를 가는 한 송이 꽃향기처럼, 

   향기로운 인연을 만난 그 향기는 인생길을 가는 내내 떠오릅니다...


개울가 버들강아지가 피었다, 어느새 봄기운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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