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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n 18. 2024

성찰이 필요한 시간

  “↡♪⤲↯★♬√∑”

 이 난해한 기호들의 나열은 낙하물이 떨어지면서 내는 모호한 의성어를 기호화하였다. “우당탕” “우지끈” “우르르 쾅쾅” 의성어들은 왜 한결같이 [우-]로 시작하는 우(愚)를 범하는지 심히 유감이다. 어떤 문자도 소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같은 소리도 언어별 표기법이 다르고 억지로 끼워 맞춰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왜곡하는 영어 발음은 우습기까지 하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이 책은 소리를 누르는 단추가 있어서 자연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장치가 달려있으면 좋겠다. 


 한밤중 갑자기 들리는 낙하물 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 소리는 멀리 달아난 잠을 순식간에 불러들였고 소리가 멈춘 뒤 잦아든 고요함은 오히려 소리의 여운을 더 크게 증폭시켰다. 불을 켰다.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벽에 걸린 그림 액자, 접착식 후크가 떨어지면서 같이 떨어졌다. 


 충격으로 그림이 튀어나온 액자는 두 동강 나 있었다. 아크릴 덮개는 멀쩡했고 액자는 날 밝으면 접착제로 붙이면 될 것 같았다. 왜 하필 한밤중에 떨어져서 사람 식겁하게 만드는지 멀쑥한 벽을 째려보다가 다시 불을 껐다. 아침에 깨어 보니 벼랑에서 떨어진 동강할미꽃은 무사하였다. 기역 자(ㄱ) 두 개로 분리된 액자 파편도 순간접착제로 붙였더니 멀쩡하다. 


 칠 년 전 그린 동강할미꽃 그림은 바탕색을 백지로 두어서 볼 때마다 색을 입혀주어야지 미루고 또 미루었었다. 백지장이 너무나 창백하여 할미꽃에 미안하였다. 할미꽃이 피어나는 봄철 대기는 얼마나 평온하고 눈 부신 빛이 꼬물꼬물 생동적이던가. 


 봄 햇살 닮은 아주 엷은 노란색을 입혀주고 싶다. 너무 밝은 노랑은 할미꽃 감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미색보다는 조금 진하고 은은한 빛이 감도는 로즈 코키야주(rose coquillage) 색연필로 살살 칠해보았다. 투명한 봄철 대기를 나름 잘 표현해 주는데 뭔가 개성이 부족한 느낌. 여러 색을 테스트하다가 세이지 그린으로 동강의 시퍼런 물결을 표현하면 할미꽃이 확 살아날 것만 같다. 


 직물을 교차하여 엮듯이 로즈 코키야주, 세이지 그린을 이중으로 칠해보았다. 이중 레이업 채색은 투명함과 차츰 멀어지면서 칙칙함으로 변해갔다. 꽃들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재빨리 지우개로 바탕색을 흐리게 지웠다. 그러자 두꺼운 화장을 벗겨낸 듯이 여백에 숨통이 돌면서 꽃들이 다시 활기를 입기 시작했다. 바위 낭떠러지에 핀 동강할미꽃 다섯 송이는 연한 녹색의 기운을 배경 삼아 사계절 피는 나의 꽃으로 되살아났다. 

 

 고유한 성품을 살려주기 위해 바탕색을 지우는 내면의 성찰도 마찬가지 아닐까.

본바탕이 넉넉하고, 요란한 자신의 색을 지울 수 있어야 품어줄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자칫 개성으로 착각하고 이상야릇한 색깔로 형체 불분명한 덧칠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얼룩을 지우려면 냇가에 앉아서 빨래하면 된다. 


 욕망, 욕심,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오염된 바탕색을 물로 흠뻑 적셔서 때를 빼는 일 그것이 바로 성찰이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남 탓하며 볼멘소리 하면 자신의 무구함이 입증될까. 돌을 따라간 그 눈길과 마음조차 잘못임을 알아차리면 좋겠다. 또 이미 가라앉은 돌을 꺼내어 다시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행위도 잘못되었다.

 

 상현달이 뜬 어젯밤 하현달이 떠 있던 지난달이 떠올랐다. 그 밤은 아버지를 여읜 고통의 밤길을 하현달을 따라서 무작정 달렸었다. 그 하현달은 어둠을 비추는 상향등이었고 내 어두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믐달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생명력이 왕성한 빛으로 충만한 달이었건만 아버지의 마지막 숨을 거둬간 우주에 홀로 훤히 뜬 그 달이 미웠다. 

 

 하현달의 반대편 여백에 새로이 생겨난 상현달을 보면서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내 나이 무렵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공직에 계시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고 나서도 저녁 숟가락 놓고 나면 수양(修養) 공부하는 곳으로 가서 밤늦게 돌아오셨다. 이러한 일과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셨다. 늦은 밤 짙은 어둠을 되감아서 귀가하는 아버지의 자전거 소리가 들릴 때까지 누워서 잠들다가도 공부하는 척 책상에 앉아있곤 했다.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서 지금 내 모습을 반성해 본다. 각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고 그 길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지 않을까. 내면에 설익은 씨앗 하나 영글 때까지 자신을 둥글게, 둥글게 성장시켜 가는 것.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 하루의 깃털을 뽑았을 때 그 깃털이 전체 인생을 성실히 답변해 주는 그것. 

 

 큰일을 치르면서 여러 인간 군상들을 살펴보았다. 슬픈 감정에 스며들지 못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슬픔은 뻣뻣하게 고개 드는 아상(我相)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물결 같은 감정이다. 하염없이 젖어들고 무거워지고 납덩이처럼 심해로 가라앉는다. 그 처절하고 숙연한 감정의 흐름에 동참이 안 되는 감정은 어떤 감정일까.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는 돌연변이 감정은 자기모순이자 자기 궤멸의 과정을 걷고 있는 사람의 부조화를 말해준다. 다른 사람의 말은 수시로 입막음하면서 궤변을 늘어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런 부류는 자극적인 시선이 언제나 외부로 향해 돌출된다.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이기적인 말초신경을 곤두세워 세상의 정보를 수집한다.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이득은 문어 빨판처럼 흡착시켜 잡아당기고 그 강력한 흡인성은 타인의 상처를 거들떠보지 않는 폭력성을 띤다. 탐욕적인 수집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먹물을 내뿜어서 교란작전을 펼친다. 


 TPO 불문 예외조항은 자기 자식에게만 할애된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담기는 물도 적은 법. 자신을 괴롭히는 물이 쉽사리 튀니까 작은 외부 자극에도 민감하다. 생존마저 치열한 방식을 선택한다. 맨날 종지 물이 엎어지고 튀는 이에게 “당신은 지금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충고가 받아들여질까.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멀찍이 피해 가는 것이 이롭다. 하늘이 만든 그릇의 깊이를 누구 탓하랴. 

 

  성찰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워도 꿋꿋이 버티는 절제와 인내.

  성찰은 빛나는 앞모습 뒤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

  그 속에서 냉혹한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 것.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것.

  석양과 노을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

  무언가에 이끌려 궤도 이탈한 자신을 호되게 질책하는 것.

  멀리 떨어져서 반짝이는 별을 숨기게 하는 것.

  더 부드러워지고자 냉정하고 금속성을 띠는 시간.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머릿속에 비를 맞지 않으면, 무엇이 만개하겠는가?” 동아시아 속담이다.

비를 끌어당겨 마음속에 부유하는 먼지와도 같은 잡념을 가라앉히는 것을 말함이리라. 물기운으로 가슴속에 붙은 불기운을 꺼버리는 비유 아닐까. 싸늘한 비를 맞는 순간은 고통스럽다. 자신을 질책하는 회초리는 아프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은 무뎌지고 잔잔한 치유의 기쁨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나를 알면 알수록 자아상을 그리는 지도는 점점 넓어져 대양과 합류하고 나는 지구에 사는 푸른 별 그 자체가 된다. 빛나는 별은 어둠도 깊다.      








한밤중 벼랑에서 떨어져도 멀쩡한 동강할미꽃, 절체절명의 순간 꽃을 피우는 할미꽃도 성찰하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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