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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l 22. 2024

장마철 동네 한 바퀴

 아열대성 스콜처럼 국지성 폭우가 잦은 장맛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주말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멀리 가기는 부담스럽고 가장 만만하고 편한 길, 이웃들은 무탈한지 안부가 궁금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만 가면 지난해 농사지었던 텃밭이 나온다. 잡초가 무성한 밭이 있는가 하면 이 와중에도 알뜰한 보살핌으로 잘 다듬어진 밭이 눈에 띈다. 거센 빗줄기에 맥없이 떨어진 방울토마토들이 애꿎은 물난리를 겪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 밭도 그랬었다. 물러터지고 떨어지거나 말거나 한동안 발길을 끊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텃밭 임대료 종자값 수고비 다 합쳐 가성비가 떨어지는 농사였다. 한 해 짓고 말았지만 보람차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동물도 그렇지만 생존본능에 충실한 식물은 이기적이다. 빈 땅을 놓치지 않고서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혈안이 돼있다. 꽃이건 잡초건 마찬가지 다만 곡식이나 꽃들의 생장에 방해가 되는 풀을 잡초라 부르며 뽑아낸다. 그러고 보면 꽃들은 더 이기적이다. 예쁨 받는 걸 알고서 끊임없이 잡초를 뽑아달라 아우성이다. 정원에 돋보이는 꽃들은 거친 손톱 아래 박힌 흙먼지를 노동의 대가로 치른 결과이다.


 은행나무 꼭대기에 주황색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능소화가 피어있는 교회 앞을 지나는데 검은색 시폰 원피스를 잘 차려입은 여자가 정문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을 영접하러 가는 그 길 그녀는 누구보다 멋을 부렸다. 중년의 나이 그녀는 이제 남편에게 잘 보일 일이 없고 부모님께 잘 보이려 차려입는 것도 거추장스럽다. 이리 재고 저리 재서 장만한 원피스를 오직 자신의 종교 구세주에 순수하게 잘 보이고 싶어 입지 않았을까. 어깨 라인이 비치는 시폰 소재 원피스마저 경건해 보인다. 


 길을 한 번 더 건너면 근처 아파트로 가는 샛길이 나온다. 이 길을 발견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전에는 나지막한 언덕 위 원두커피 맛이 좋은 하얀 카페를 지나서 주택가를 빙 에둘러 갔었다. 어느 저녁 한 커플이 이 길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 따라갔더니 가로지르는 샛길이었다. 그때 이후 이 길로 편하게 다니고 있다. 일요일 오전 아파트 단지 층층이 얹힌 수많은 집들이 조용하기만 하다. 큰 소리 나는 집도 없고 다시 시작하는 월요일을 하루 앞둔 날은 그저 조용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널브러져 게으름을 피운다. 


 산책길 반환점을 앞두고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대기 중 흐르는 습도 높은 공기층이 미세한 물길을 만들어두고서 팔다리를 헤엄쳐 건너도록 무겁게 가라앉힌다. 두유 토마토 시리얼을 먹고 나왔음에도 힘이 다 빠져버렸다. 잿빛 구름을 뚫고 나온 햇빛이 간간이 비쳐 불쾌지수를 유발한다. 더 이상 집까지 걸어갈 기운이 동나버렸다. 때마침 보이는 베이글 가게 문이 활짝 열려있다. 헤이즐넛 아이스커피, 치즈베이글을 주문 모자란 혈당을 보충하였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던 부부도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고 간다.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원한 폭포 소리 들리고 더위를 한방에 날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임시 물놀이장이 나타난다. 전에는 미끄럼틀이 놓여있는 단순한 놀이터였는데 여름철을 맞이하여 워터폴 변신하였다. 밑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연신 하늘 향해 물방울을 분사하며 떨어지고 커다란 바스켓에 유속이 빠른 물이 콸콸 공급되자 한 양동이 그득 채워진 물이 기울어지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바스켓이 차고 기울면서 폭포수가 쏟아지는 시간은 대략 30초 남짓 사이클이 빠른 편이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빨간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이 세 명 부지런한 얼리버드 가족 한 팀 또한 세 명. 휴일 오전 한산한 시각 물이 무서운 서너 살 아이를 안은 아빠는 물에 발을 담근 채 앉아있기만 하고 엄마 혼자 신나서 폭포수를 맞으며 즐거워한다. 일인 전용 물놀이장에서 젊은 엄마는 지금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물놀이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튕겨 오른 물방울과 자신만의 여름 추억! 그 아득한 추억을 소환 그 기분을 만끽하나 보다. 


 암석정원과 아름드리 팽나무 군락지가 있는 아파트 정원으로 들어섰다. 걷기 좋은 데크 깔린 팽나무 숲은 녹음이 우거져 피톤치드 함량이 높다. 걷는 길이 그대로 초록색 바람길, 우리에겐 무겁고 질척거리는 장마철 습기를 좋아하는 이끼류 화초들이 다양한 생김새로 자라나서 관상용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그늘을 층층 기워 입은 팽나무 잎사귀에도 초록 초록 열매들이 또랑또랑 달려서 청량감을 준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는 달작지근한 맛이 나는 고 작은 열매들을 어릴 적 많이 따먹었었다. 심심풀이 씹고 뱉는 껌 같았다.



 온갖 번뇌를 버리듯 껍질을 벗기면서 매끈한 살색 피부가 드러나는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꽃은 세차게 때리는 장맛비를 스무날 이상 두들겨 맞아야만 꽃봉오리를 여는 꽃이다. 자신에게 맞는 빛깔을 열어 보이기 위하여 어떤 고난을 참고 감당해야 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준다. 꽃빛도 예쁘지만 나무 수형도 의미를 주면서 보기에 좋다. 그냥 일직선으로 쭉쭉 자라지 않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가지를 뻗어나가는 모습이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심사숙고하면서 멈칫거리며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한 사람의 인생길을 닮았다. 지금부터 가을이 올 때까지 백일 가까이 무더운 여름을 아무 불평 없이 아름답게 장식하는 백일홍이 있어 더워도 덥다고 투덜대지 말자.



 우리나라 연간 강수량의 30%가 집중 쏟아지는 장마철은 귀한 수자원을 확보하는 제5의 계절. 최근 경기 북부에는 시간당 101mm 집중 호우가 내리면서 7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날이 갈수록 폭우성을 띤다. 7월 한 달 장맛비가 내리면서 뜨거운 태양을 차양막처럼 차단, 더위도 잠시 비켜가는 젖은 우산을 펼쳐 보이는 장마. 


 봄철 내내 찔끔찔끔 내리면서 대지에 쌓인 갈증을 속시원히 해갈해 주고 뿌리내린 곡식들이 폭풍 성장하여 갈바람에 영글도록 징검다리를 껑충 놓아주는 대나무의 마디 같은 것. 지금 당장 나를 뒤흔들어놓는 작은 소란들이 우릴 한 층 더 성장하게 하는 장맛비 아닐까. 비구름이 지나고 난 하늘은 한결 더 높아져 새로운 질서를 운행하도록 이끈다. 빗물이 차 올라 양말 바닥이 다 젖고 바짓가랑이 젖는 우중 불편함 이 또한 금세 지나가리니.




장마철 끈적임을 아무 불평 없이 스며들며, 피어나는 이 우아한 백일홍이 보고 싶어 쇼핑몰에 일부러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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