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사우나에 갇힌 장마철 유리창에 뿌옇게 내려앉은 습기에 대고 글자를 적는다.
무지개 원추리 봉선화 채송화 매미.
무더위가 자아내는 오색 색감을 떠올리자 유리창에 번지는 습기마저 알록달록 긍정하게 된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데 끌리는 옷자락처럼 축축 처지는 기분을 끌어올릴 활력소가 절실한 시점.
깊고 깊은 산속 둥근 바위에 낀 초록색 이끼를 적시며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가 듣고 싶어 서재방 책장에 꽂힌 법정스님 책 '오두막 편지'를 오랜만에 꺼내어 읽었다.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와 개울물 소리에 잠이 깨신 스님! 초복을 지나 장마가 개더니 여름 달빛에서 향기가 난다는 스님! 맑고 향기로운 말씀이 담긴 책갈피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아취에 빠져들자 안개 꽃다발 같은 장마철 습기가 저만치 물러나고 마른 오솔길 사이로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왔다.
스님이 소개한 수피즘 우화를 여기에 옮겨본다.
'어떤 강물이 있었다. 이 강물은 깊은 산속에서 발원하여 험준한 산골짜기를 지나고 폭포를 거쳐 산자락을 돌아서 들녘으로 나온다. 세상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흘러 다니다가 어느 날 모래와 자갈로 된 사막을 만나게 된다. 사막 너머에는 강물의 종착지인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그 바다에 이를지 강물은 당황하게 된다.
바다로 합류하려면 기필코 그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 강물은 마음을 가다듬고 사막을 향해 힘껏 돌진해 간다. 그러나 사막과 마주치는 순간 강물은 소리 없이 모래에 빨려 들어가고 만다. 강물은 정신이 번쩍 든다. 어떻게 하면 이 사막을 무난히 건널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때 문득 사막 한가운데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에 네 몸을 맡겨라. 바람은 사막 저편에서 너를 비로 뿌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언젠가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이다. 각자 자신이 처한 우여곡절을 거쳐 굽이굽이 산자락을 돌고 돌아서, 커다란 바위에 갇혀 소용돌이치다가, 폭포수 되어 곤두박질, 다시 정신을 차려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중간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외톨이 강물도 있다. 어떤 강물은 힘차게 흘러서 보다 빨리 바다에 이르러 멋진 항해를 하는가 하면 어떤 강물은 힘이 다 빠진 노년에 이르러 닿는 경우도 있다. 인생을 바다에 비유하는 것은 하늘과 만나는 수평선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수증기를 증발시켜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자유롭게 하늘과 만나게 된다. 구름은 유이면서 무, 바람에 실려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고, 빗물이 되어 강물의 발원지로 환생하는 기쁨을 누린다.
바다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과 창조의 영감을 자극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그 신비로운 바다에 닿기 전 거대한 사막이 가로놓인다. 맨몸으로 부딪혔다간 흔적 없이 빨려 들어 사라지고 말 사막, 어떻게 건너면 좋단 말인가. 수피즘 우화는 바람에 맡기라고 말한다. 바람에 몸을 맡기려면 하늘을 감동시키는 지극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약을 거쳐 조화로운 순리에 따르게 된다. 하늘은 이런 의지를 가진 사람을 기꺼이 허락한다.
나는 지금쯤 사막의 어디쯤 건너고 있는 것일까. 하늘을 감동시키는 의지가 부족해서 나침반 하나 손에 들고 방위를 헤아려본다. 때로는 낙타의 등에 올라탄 캐러반이 되어 대상 행렬에 합류한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칠레 북부 안데스 산맥 서쪽에 자리한 아타카마 사막에는 올해 엘니뇨로 예년보다 비가 많이 내리면서 한겨울에 해당하는 7~8월 '꽃 피는 사막 현상(데시에르토 플로리도 Desierto Florido)'이 나타났다고 한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 품은 꽃씨가 언젠가는 꽃밭으로 변신하는 기적을 믿으며 지쳐 쓰러지기 전 미술관으로 피신했다.
한여름 미술관은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오아시스, 이보다 더 나은 피서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한 줄기 바람을 만나기 위하여 무작정 찾아간 미술관에서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OLIVIER DEBRÉ: MINDSCAPE)' 전시회를 보면서 메마른 정신이 한 차원 비약하는 상승감을 누렸다. 전시 브로셔에는 그의 작품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올리비에 드브레는 실제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자신의 오감을 통해 마음에 새겨둔 색채와 구성으로 자연풍경의 깊은 울림을 전하고자 하였다. 예술 장르 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그의 회화도 다른 매체들로 확장되고, 조각과 설치처럼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의 캔버스에는 실제 풍경의 형태가 사라지고, 내면화된 공간과 정서만이 남아 있다."
<2부, 심상 풍경의 구축> 공간에 들어서면 가로길이가 3미터에 이르는 그림 세 점이 전시된 '루아르의 방'이 나타난다. '루아르' 이름이 지명을 말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간접 조명에 비친 그림을 찬찬히 올려다보면 물 내음이 물씬 나는 강물을 만나게 된다. 노을빛에 반사된 저녁 강물이 오묘한 색채를 실어 나르는 물살의 깊이에 떠밀린다. 초록색으로 물든 강가에서는 완만한 흐름을 늦추면서 수심이 깊은 강물 한가운데 이르면 유속이 빠른 거친 붓질이 섬세한 물길의 흐름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강물은 잘 감긴 실타래처럼 수천 수만 겹겹의 개성적인 물길을 감싸안으며 학연 지연 혈연 따지지 않고 어우렁더우렁 어울린다. 선후도착 따지지 않는다. 얼핏 보면 강물이 하늘이다. 황토색 강물에 흘러내리는 붉은 얼룩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것은 흐르는 강물의 비가역성을 말하는 것 아닐까. 돌아오지 않는 강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다. 어떤 아픔도 눈물도 핏물도 그대로 실어 나르며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는다. 흐르는 것들은 듣는 귀가 없다. 애도하는 입이 없다. 어떤 결과에 이른 당위성과 운명을 수용할 뿐이다. 다만 흘러가면서 아픔이 씻기고 더러움이 정화되고 시간이 해결해 주는 수동적 힐링 이것이 세월이다. 루아르 강은 프랑스 평원을 가로질러 비스케이만으로 흘러드는 길이가 1,012km에 이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이다. 루아르 강이 있는 투르는 울리비에 드브레에게 예술적 원천이 된 중요한 지역이라고 한다.
형체가 간직한 고정관념을 타파 아웃라인 없이 속살을 헤집는 그의 표현방식은 경계를 허물어 자유로운 상상을 허용하고 존재의 핵심에 이르는 심연을 극명하게 전달한다. "내가 바람이나 비, 흐르는 물과 같아질 때,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자연은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그의 그림은 자연과 물아일체가 된 명상이요, 영원에 이르는 기도, 세상에 흩어진 빛을 간절히 모으는 구도의 길이었다. 그가 멕시코에서 만난 빛은 분홍색, 도쿄에서 만난 빛은 푸른 수직선과 노란색, 이스탄불에서 만난 빛은 밀키핑크, 휴스턴에서는 황톳빛 분홍, 노르웨이 레르달 폭포는 흰색과 카키색, 노르웨이 순달스피오르 아침색은 회백색 푸름, 스바뇌위 군도에서 만난 빛은 차갑고 푸른 선들이 수평으로 얽혀 있었다.
그는 색채 파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파랑은 가장 비현실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색으로(흰색과 검은색 다음으로),
파랑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여느 색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원초적이고 물리적, 생리적인 반응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것은 뒤얽혀 있다.
파랑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하늘인 까닭이고,
하늘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파란색인 까닭이다.
내가 '파랑'을 생각하고 '파랑'을 말하면,
파랑이 만들어내는 느낌이 형상화되는 것,
그것은 당신 안의 영원이다."
자연의 영원성을 소재로 헌신을 다한 작품들은 사막을 건너는 내게로 와서 바람이 되었다가 강물이 되었다가 하늘이 되었다. 이것은 소통의 장벽을 없앤 그의 예술이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른 증거이다. 한 달 넘게 내리던 장맛비가 뚝 그쳤다. 아타카마 사막에 핀 꽃들은 꽃씨를 날리면서 바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