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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Feb 24. 2024

엉뚱하고 귀여운 나의 작은 코뿔소

목요일 아침. 딸아이의 아침 배구연습이 있는 날이다. 

7학년이 되면서 루나는 배구를 시작했다. 화요일 오후에 하는 방과 후 활동인데, 12월부터 2월까지는 싱가포르에 있는 다른 국제학교와의 경기주기적으로 열렸고, 목요일 오전에는 경기 준비를 위한 연습까지 진행되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한 가지 활동만 하는 편인데 갑자기 세 번씩 운동을 할 때가 있어 좀 힘들어 보였다. 가느다란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본인이 좋아하니 지켜볼 뿐이다. 


싱가포르로 이사 오고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닌다. 내가 차로 데려다주면 10분 만에 갈 거리지만 30분씩 걸려 스스로 다니는 길이 아이들을 더욱 성장시킨다. 아니, 성장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이들은 자립심이 생기고 나는 자유시간이 생기는 마음에 드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다. 


아침 배구 연습이 있는 날은 차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줬다. 자립심도 중요하지만 밖이 아직 어두운 시간대에 눈도 제대로 못 뜬 12세의 여자 아이에게 지하철로 학교에 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들이 한 시간 정도 후에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딸아이만 Grab Taxi를 태워 배구 연습에 보낸 적이 있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자가용이 없는 집도 많고, 부모의 스케줄과 맞지 않으면 아이들을 Grab Taxi에 태워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Grab 앱으로 차가 운행하는 경로와 도착시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편이지만 아이가 학교 가는 내내 아무 일이 없는지 신경이 쓰였다. 해가 뜨기 전 아직 깜깜한 새벽 시간이라 더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깜깜한 시간은 착한 Grab 기사 아저씨들도 갑자기 나쁜 놈처럼 보이는 시간이다. 이번 시즌의 마지막 배구 연습이 있는 날, 아들에게 전날 알아서 깨서 아침을 챙겨 먹고 있으라고 당부해 두었기 때문에 걱정 없이 딸아이와 집을 나섰다. 

  

"엄마, 나 앞에 탈까?"

"아니. 뒤에 타."


이제 키가 어른만큼 큰 아이들은 조수석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만 뒷 자석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보통 아이들을 뒤에 태운다.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를 두 번 겪었다. 두 번 모두 아빠가 운전하셨고, 한 번은 아빠의 코뼈가 부러지고, 창문 유리의 파편이 언니의 얼굴에 박혔었다. 그래서 그런지 운전을 할 때 항상 사고 생각이 난다.   


"운전석에서 대각선 쪽 자리가 상석이래. 상석이 무슨 말인 줄 알아? 나이 많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를 말하는 거야. TV를 보면 회장님들이 항상 그쪽에 앉아 있잖아. 통계적으로 거기가 제일 안전한가 봐. 엄마는 조심해서 운전하는 편이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너라도 안전해야 하잖아." 


걱정이 많은 나는 또 말이 길어졌다.


"엄마, 근데 그게 상황에 따라 다르지. 저 옆길에서 코뿔소가 달려 나온다고 생각해 봐. 그래서 우리 차를 들이받는다면 코뿔소랑 먼 쪽이 안전한 거지."


"아니, 루나. 우리가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싱가포르 도심에서 왜 코뿔소가 달려 나오니?"


슬픈 상상에 취하기도 전에 엉뚱한 코뿔소가 나를 들이받는다. 참 엉뚱하고 귀여운 나의 작은 코뿔소.


갑자기 긴긴밤의 코뿔소 노든이 생각난다. <긴긴밤>을 읽은 후론 나에게 코뿔소는 곧 노든이었다.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을 받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 동물이 주인공이라서, 그림이 이뻐서 아이들에게 읽어준 적이 있다. 두 아이의 한국어 실력에는 좀 어려운 책이었지만 내용이 아름다워 천천히 함께 읽어 나갔다. 하루에 딱 한 챕터씩만 읽었는데, 아이들이 읽기 싫어하던 날도 어떻게든 설득을 해서 꼭 읽고야 말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긴긴밤>이 한국의 <어린 왕자> 같은 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어른 동화책. 아이들이 나와 한번 읽고 커서 스스로 다시 읽으면 이 책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동화가 슬픈 것 같다고 했다. 노든의 친구들이 자꾸 죽으니 슬픈 느낌이 어렴풋이 나는데 죽음이 뭔지 잘 모르는 아이들은 정확히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기쁨이다. 아이들은 흰 바위코뿔소 노든과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이 보낸 긴긴밤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추고 덮어야 할 상처가 없어서 슬픈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사고 얘기를 해도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슬픔보다 초원의 코뿔소를 상상하는 건 그저 다행이었다.  

 


노든의 말대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든은 어린 코끼리나 어린 코뿔소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펭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노든이 펭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치쿠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아프거나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이라며 옛날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노든의 가족과 코끼리들, 앙가부, 치쿠와 윔보의 얘기를 들으면서 밤을 견뎠다. 그러다가 내가 잠이 들면 노든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긴긴밤_P82)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린 펭귄에게 준 노든의 마음을 안다. 노든에게 펭귄이 있다면 나에게는 루나가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귀여운데, 엉뚱해서 더 귀여운 나의 작은 코뿔소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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