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남국문학상 우수상 수상
어느 오후, 그림을 그리는 친구의 보광동 작업실에 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이 서울 독일학교를 다닐 때 학부형으로 만나 친해진 친구였다. 친구 작업실에 가면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작품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당시 딸로, 엄마로, 작가로의 자리를 찾는 과정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친구 작업실까지는 걸어갈 수 있었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한남뉴타운 재개발 계획 때문에 버려진 집이 많아 황폐하고 스산한 길을 통과해야 했다. 갈 곳이 없고 여윳돈이 없어 재개발 소식이 전혀 기쁘지 않았을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운동 부족으로 체력이 바닥이었던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우사단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삭막한 길에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었다. 그때 길가 어느 집의 대문이 열리고 흑인 남자가 나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주의를 집중하고 걷는데 그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 How are you?"
나는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며 I'm good." 하고 대답했다. 그가 그냥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걷는 속도를 살짝 늦췄다. 그러다 그 남자가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힘들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국말로 "힘들어?" 하고 묻는 그 남자의 말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긴장과 경계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는 코로나 시기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나는 내가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반달눈을 최대한 크게 만들며 그를 보며 웃었다. 웃고 있는 그의 눈은 따뜻한 흑진주처럼 예뻤다. 낯선 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이웃인데 피부색 때문에 경계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미안했다. 사실 그 길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와 마주쳐도 흠칫 놀랄만한 스산한 길이었지만, 혹시 그 사람이 내가 자신의 피부색 때문에 경계를 했다고 생각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이방인의 서러움을 잘 아는 내가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그런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독일에서 8년간 살았다. 첫째가 유치원에 처음으로 가던 날, 이방인이라서 받은 부당한 대우를 잊지 못한다. 아이도 나도 긴장을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준비가 더뎠고, 아침 식사로 아이에게 급하게 바나나를 먹인 후 유치원까지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서둘러 갔다. 바나나를 너무 급하게 먹은 것일까?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건물 입구에서 아이가 토를 했다. 세 살짜리 아이는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었고, 당황한 나는 아이가 창피하지 않게 빨리 치우려고 휴지를 찾고 있었다. 그 찰나에 지나가던 독일 엄마가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가 아픈데 유치원에 데려오면 어떻게?"
독일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존댓말을 하는데, 그 여자는 나에게 심히 불쾌하다는 어투로 반말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전염병에라도 걸린 내 아이가 자기 아이에게 병을 옮기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독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뒤셀도르프의 대학 부속 어학원에서 10개월간 독일어 과정을 들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해 고급과정까지 다 끝냈지만 독일 엄마와 말로 싸워서 이길 수준은 되지 못했다. 아이가 한 살이 되면서부터 남편과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해 오고 있었지만 남편과의 말싸움에서 가끔 이기기도 했던 이유는 독일어 실력이라기보다는 '부인을 잘못 건드리면 더 큰 화가 닥친다'는 인류 불변의 법칙을 터득한 남편의 일보 후퇴였을 가능성이 컸다. 뭐라고 반박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 여자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고, 나는 그 여자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 유치원에 가기 전날이 마침 아이의 정기 검진 날이어서 소아과에서 아이의 건강상태를 확인했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아침에 급하게 먹은 바나나가 문제였던 것 같다. 마침 우리 쪽으로 오신 선생님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한 엄마가 뭐라고 하니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일단 집으로 가겠다고, 다음날 다시 유치원에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괜히 창피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아이에게 설명을 했다.
"토한 거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가 늦는 바람에 바나나를 빨리 먹었고, 가는 길에 뛰기까지 해서 위가 놀랐나 봐. 오늘은 집에서 엄마랑 놀고 내일 다시 유치원에 가자."
아이는 집에 돌아와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잘 놀고 있는데 난 화를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아이에게, 나에게 무례하게 군 그 여자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독일에 살면서 이방인이라서 서러웠던 적이 처음도 아니었는데 그날의 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아이를 위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독일 사람이었다면 저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사전을 꺼내어 독일어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적은 문장들을 여러 번 읽고 외웠다. 아이들 픽업 시간이 다가왔을 때 혼자 유치원 앞으로 가 그 무례한 여자에게 말을 했다.
"어제는 우리 아이 정기 검진일이어서 병원에 갔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아프지 않다는 건 확실하고, 오늘 아침엔 아이가 바나나를 급하게 먹어서 그런 거야. 너도 부모고 나도 부모인데 누군가의 아이가 아픈 걸 보면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말은 '애를 왜 유치원에 데리고 왔냐'라는 말이 아니라, '괜찮니? 도와줄까' 하는 말이어야 해. 내 말 알겠어?"
살면서 다른 사람과 싸울 일이 별로 없어 무례한 독일 엄마와 대적할 때 긴장이 많이 됐지만 집에서 열심히 준비를 해 간 덕에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 여자는 약간 놀란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던 길을 갔고, 나는 이제껏 맛보지 못했던 통쾌함을 제대로 만끽할 수가 있었다. 엄마라서 낼 수 있었던 용기였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내 아이의 외모가 독일인들과 달라서, 내가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이어서 더욱 함부로 대할 것 같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아시아인이 별로 없는 바인하임이라는 동네라 나와 내 아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몇 안 되는 다른 아시아인을 대표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게 남편 따라 이리저리 해외에 돌아다니며 사니 팔자가 좋다고 한 적이 있다. 이방인으로 내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시간들, 평범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각 나라에서 치열하게 언어를 배우며 노력했던 시간들, 부당한 대우에 무너질 수 없어 다시 일어서야 했던 시간들을 무임승차로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해외에서 사는 것은 여행하는 것과는 달랐다. 일상에서 벗어나 단기간 동안 명소를 돌아다니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것과 모국어를 쓰지 못하는 나라에서 관공서, 병원, 학교를 다니며 그 나라 사람들과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내가 사는 삶을 그저 쉽게만 보는 사람들이나, 나의 피부색 때문에 내 세계에 들어와 보기도 전에 벽을 치는 사람들이나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것으로 얄팍하게 규정짓는 것,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이해했다고 스스로 믿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지는 한계가 아닐까.
독일 엄마와 대적한 이후로 십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이제 꽤나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삶에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과 나 사이에 안전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다르니 이해받으려고 불필요하게 노력하지 말자', '나 역시 남의 상황을 안다고 단정 짓지 말자',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니, 내 마음을 지키고 나를 가꾸며 살아가자'와 같은 지혜도 세월과 함께 터득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그 꿈이 어떤 꿈이든 간에 기득권이 없는 이방인들이 자기의 자리를 마련해 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아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 보다, 속하지 못해서 느끼는 좌절이 더 클 때 우리는 이방인으로서의 힘든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세계 어딘가에서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꿈을 따라 이방인으로 살고 있을 당신이 다른 국적 때문에, 다른 피부색 때문에, 부족한 언어실력 때문에 가끔은 주저앉게 되는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고, 가족의 자리를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지켜내는 우리의 시간은 언젠가는 어떤 웃음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