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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Dec 03. 2023

인형의 방 그리고 홀로 남은 아버지

부모의 노년

어둡고 스산한 독일 겨울의 어느 오후.


띵동!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시간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위층 할아버지였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웃는 법이 없는 무뚝뚝한 분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바인하임(Weinheim)은 나름 작은 성과 예쁜 공원이 있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파는 주말장이 서고, 괜찮은 레스토랑들이 있어 로컬들 사이에서는 살기 좋은 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근처에 유명한 도시로는 15분 거리에 하이델베르크가 있다. 


"Hallo, Frau Kim, möchen Sie eine Puppenstube kaufen?"

위층 할아버지는 나에게 Puppenstube(푸펜슈투베)를 살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이들이 어려 할아버지를 따라 잠깐 지하 창고에 가는데도 아이들 둘을 다 데리고 가야 했다. 할아버지가 보여준 Puppenstube는 인형의 방이었다. 3면의 인형의 방 안에 실제 물건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미니어처 사이즈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귀여운 물건을 좋아하는 나는 바로 갖고 싶다고 말하며 가격을 물었더니 가구가 다 채워진 인형의 방 하나당 10유로만 받겠다고 했다. 난 인형의 방 가치를 잘 몰랐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소품 하나만 봐도 제시한 가격이 저렴한 가격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니멀리스트와 거리가 먼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부엌, 거실, 별장 등 인형의 방 세트를 4개나 샀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한 인형의 방은 부엌 세트였다.


   

할아버지의 부인이 소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가게를 정리했다고 했다. 부산스럽게 4개의 인형의 방을 집으로 옮긴 후 찬찬히 소품들을 구경하는데 물건 하나하나가 정교하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오븐의 모든 문이 열리고, 냄비도 실제와 똑같이 생겼으며, 소금, 후추통을 비롯해 커피 가는 기계도 실제로 손잡이를 움직일 수 있었다. 가구들의 서랍도 모두 열렸다. 작은 철제 쓰레받기가 있었는데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니 7유로였다. 단순한 쓰레받기 하나가 7유로라면 다른 물건들은 도대체 얼마나 값이 나가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도 없었다. 수집가들이 벼룩시장이나 전문상가를 돌아다니며 소중히 모아야 할 것 같은 물건들을 쉽게 손에 넣은 것 같아 흐뭇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건물에 은퇴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서 인형의 방은 젊은 가족인 우리에게 파는 것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차갑고 무뚝뚝하다고 최대한 피해 다녔던 게 죄송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윗집 할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파서 가게를 정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와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어 아프신지도 몰랐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지났을까? 할아버지 집에는 할아버지 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다른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돌아가신 위층 할머니와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할머니를 집에 들인 이웃 할아버지가 실망스러웠다. 두 부부의 사이가 어땠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함께 산 할머니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느낌에 기분이 나빴다. 같은 여자로서 할아버지가 괘씸했다. 


올여름 엄마가 혈액암으로 돌아가셨다. 엄마 나이 79세였다. 엄마는 8년간 투병을 했고, 암환자인지 모르게 건강했던 날들도 있었고, 항암치료로 고생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아빠가 함께 했다. 83세지만 나이에 비해 건강한 아빠는 아픈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도 함께 갔고, 엄마가 입원했을 때는 간병인을 쓰기는 했지만 엄마 곁에서 엄마를 살뜰히 챙겼다. 


엄마를 보내고 홀로 남은 아빠는 챙길 사람이 없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외로운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집이, 간병인도 오가지 않는 집이 너무 크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살던 그 집에 평생 살겠다고 누누이 말했던 아빠는 어느새 큰 집이 쓸쓸하다며 실버타운으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혼자 남아 있는 아빠가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혼자 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눈치챌 사람이 없는 게 제일 신경이 쓰였다. 싱가포르로 돌아오기 전 교대로 근무하는 경비아저씨 두 분에게 언니의 전화번호를 남기며, 매일 산책을 다니는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전해두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일하셨던 분들이 아직도 일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는 것만큼 경비아저씨들의 나이도 들어 나는 친정에 갈 때마다 소보루 빵이나 단팥빵을 사다 드렸다. 별거 아닌 친절에 기뻐하셨던 아저씨들. 하루종일 작은 방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지루한 일상 중에 아빠와도 담소도 일과에 들어있으면 좋겠다. 


혼자 있는 아빠를 생각하니 갑자기 바인하임 위층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혼자의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구한 할아버지가 그저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고, 고령의 아빠가 혼자가 되니 혼자 버티는 시간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위층 할아버지의 선택도 누군가라도 곁에 있는 게 필요한 노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빠가 얼마나 길지 모르는 노년을 쓸쓸히 보내는 것은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삶은 언제나 나에게 단편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질문을 던진다. 


우리 집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미니어처 부엌을 볼 때마다 정교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모를 서글픔과 씁쓸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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