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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강 Dec 04. 2020

당신의 과실비율은 몇%인가요

‘과실’ 내지는 ‘과실비율’은 교통사고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특히, 사무실에서 손해배상사건을 많이 수행하고 있는 관계로, ‘과실’은 제가 일을 하면서 흔하게 쓰고, 읽고, 듣고, 말하게 되는 매우 익숙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과실은 ‘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이나 허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결국 과실은 부주의, 태만과 사실상 동일한 의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실은 ‘고의’와 주로 비교가 많이 되는데, 고의는 행위에 대한 결과를 인식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경우의 심리상태를 의미하므로, 부주의 내지는 태만으로 인해 잘못된 결과를 발생시키게 되는 과실보다는 목적성, 위법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인정되어 높은 비난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형사에서는 고의인지 과실인지의 여부에 따라 범죄의 성립 여부, 범죄의 유형, 처벌가능성이 모두 달라지지만, 민사에서는 고의와 과실은 모두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형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손해배상책임의 범위에 있어서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인지,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인지의 차이는 매우 크게 나타나겠지만요.      


법률적으로 어떠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 즉, 본인의 행위의 내용과 결과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를 ‘책임능력’이라고 하는데,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판례는 대체적으로 만 11 ~ 12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책임능력이 없다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처럼 책임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아동이 부주의 혹은 고의로 위법한 행동을 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에는 부모 등 감독의무자가 본인의 감독상 과실에 근거하여 책임을 지게 됩니다. (만 12세 이상 연령의 미성년자의 불법행위의 경우에는 부모가 자녀와 함께 공동으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과실이 흔히 문제가 되는 경우라고 하면 교통사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교통법규를 잘 준수하여 안전한 방법으로 운전함으로써 다른 차량, 보행자 등 타인의 신체, 재산에 피해를 주지 아니하여야 하는 주의의무를 부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사고경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사고발생에 있어서 어떠한 과실이 기여하였는지를 특정하고 그 정도를 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고, 대망의 ‘과실비율’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과실비율은 매우 예민한 개념입니다. 민법 제396조는 피해자의 과실비율을 고려하여 가해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과실상계’라고 부릅니다. 결국, 피해자의 과실이 조금이라도 인정되면, 그 비율만큼 본래 지급되어야 할 손해배상액, 이를테면 치료비, 휴업손해, 위자료 등이 모두 감액이 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많이 다쳤거나, 고가의 외제차량의 경우에는 손해배상액의 규모가 수억에서 수십억 원이 될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피해자의 과실비율이 10% 더 인정되면 배상받을 수 있는 금액이 수 천만 원, 수억 단위로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요즘은 블랙박스가 보급되어 있고, 교통사고 판례, 보상처리 사례 등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확보되어 있어 과실비율 판단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누가 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방과실 교통사고가 아닌 이상, 모든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는 과실비율을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판단하여 제시하는 것은 법원, 보험사, 교통사고 당사자 모두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판단은 아직 사람이 하니까요. 결국 누군가는 결과에 불만족스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통사고 손해배상사건에서 과실비율은 피해자와 보험사(가해차량)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 중 하나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피해자의 과실비율에 따라 손해배상금의 규모가 크게 달라지며, 교통법규의 해석, 사고 당시의 도로상태, 운전자의 주관적 인식, 차량조작 방식 등에 대하여 당사자의 주장이 상이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당사자의 감정(주로 분노)까지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법정에서 동일한 블랙박스 영상을 틀어 보면서도 사고경위와 과실비율에 대해 원고와 피고가 그렇게나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사자의 주장을 모두 들은 후 과실비율을 판단해야 하는 지위에 있는 판사님이 가장 머리가 아프겠지만, 과실비율로 치열하게 다투는 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저도 가끔은 과실비율 몇 대 몇이 AI로 정확히 정해지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되면 제 업무분야에도 타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변호사란 직업은 분쟁을 먹고사는 직업이다 보니 이런 걱정도 해보게 됩니다.       


‘과실’은 교통사고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능력을 부담하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주의의무를 부담하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용무를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고위험, 혹은 과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본인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화재나 누수처럼 본인이 관리하는 시설물에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본인이 관리의무를 부담하는 자녀, 애완동물이 사고를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본인의 부주의 정도, 즉, 과실비율에 따라 손해배상의 범위가 확정되는 것이죠.      


저는 사무실에서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부주의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다루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워낙 다양한 유형의 사고를 접하다 보니, 보험사고, 손해배상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들은 안전염려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오히려 안전불감증이 있던 상태에서 일을 하면서 안전의식을 겸비하게 된 상태에 있게 되었지만요. 아무래도 사고경위를 검토하여 손해배상책임의 발생여부, 과실비율, 위자료를 포함한 손해배상액에 대한 법률적 의견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본인의 주의의무에 대하여 더 경각심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지위에 있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개인적인 소망은 사회가 모두에게 조금은 더 안전한 곳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책임, 주의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원래 사고란 건 발생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법제도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정의와 형평의 원칙에 부합하게  손해배상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특히 이 기대에 대해서는 저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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