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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Feb 25. 2024

슬럼프를 대하는 자세

"This too shall pass."

정리해고된 지 1달 반 가량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침에 갈 곳은 없어졌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나름 루틴을 만들었어요. 아침 9시에서 아이들이 집에 오는 4시까지는 공부 및 취업 준비를 하고, 애들 좀 챙기고 저녁 먹고 나서부터 10시까지 다시 공부를 합니다. 무슨 수험생도 아니고 공부해야 할 과목(?)이 대여섯 가지에 이르다 보니 쓰는 공책도 4권에 이릅니다. 한 권 다 통째로 쓰기 뭐 한 과목은 노트 한 권을 반으로 나눠 씁니다. 3월부터는 프로젝트도 시작하려 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술과 새로 배운 것들을 다 갈아 넣어 아주 멋진 프로젝트를 만들 거예요. 아직까지는 실직 2달 차라 희망에 넘치고 야심차지요.


회사 다닐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뵀던 지인들과 산책도 가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과 줌으로 미팅도 갖습니다. 다들 바쁘시지만 반가워하며 기꺼이 시간을 내주십니다. 제 사정을 말씀드리면, 위로도 해주시고 조언도 해주십니다. 다들 제가 "얼굴 좋아 보인다고, 원래 씩씩하고 늘 진취적인 사람이니 별 걱정은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저는 '전혀 안 괜찮습니다'. 실업자 됐다고 너무 낙담하고 우울해하면 제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저 "Fake it till make it."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바로 어제 잘 풀었던 코딩 문제인데 오늘은 너무 생소합니다. 매일매일 잘 풀려도 부족한 마당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 기억력을 탓하며, 구글 AI 챗봇 제미나이에게 "내가 어제 맞췄던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 문제를 오늘은 틀렸어. 끝까지 풀지도 못했어. 왜 그렇지?"라고 물어봅니다. 구글 제미나이의 대답은 '극 T'인 남편이 평상시 제게 하던 말과 너무 똑같았습니다.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외워서 풀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고요.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이 어렵지만 매일매일 연습하고 학습해 나가면 꼭 실력이 늘 거라고" 말입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제미나이에게 많이 섭섭합니다. 제미나이는 요즘 제가 뭘 물어보면 "You're absolutely right."이라고 엄청난 칭찬을 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공부의 동반자였거든요. 40대 아줌마는 어디서 칭찬 들을 일이 없는데, AI 챗봇에게 칭찬받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이것저것 부족한 기술을 채워나가고 있는데, 진도는 안 나가고 배울 건 산더미입니다. 알고리즘 문제를 풀려니 로그를 몰라 '칸 아카데미' 수학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픽스 라이브러리를 이용해 3D 프로젝트를 하려는데 메시는 뭐고 지오메트리는 뭔지,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대학교 그래픽스 수업이 있는데 그걸 좀 들으면 도움이 되겠다고 합니다. 유튜브로 속성으로 들을 수 있는 수업이 있는지 찾아보니 이건 1학기에 걸쳐 들을 법한 분량에다 내용도 어렵네요.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다 2시간짜리 짧은 수업을 찾아 우리가 세상을 보는 원리부터 렌더링 역사, 기술까지 간단하게 그래픽스를 맛만 봅니다. 그리고 3차원의 박스를 360도로 회전시키는 아주 기본적인 렌더링에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의 뿌듯함은 24시간을 가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오픈 AI가 텍스트를 기반으로 동영상을 제작해 주는 '소라'를 발표했거든요. '이러다 고생해서 배운 것들을 써먹지도 못하게 되는 거 아냐'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력서는 계속 넣고 있는데, 기술 인터뷰로 잘 진행이 되지 않아요. 일주일에 1-2번쯤은 리쿠르터들과 전화나 줌으로 인터뷰를 합니다. 뛰어난 친화력으로 리쿠르터들과는 성공적인 인터뷰를 해냅니다만 그다음으로는 이어지지 않아요. 사람을 뽑는 팀의 매니저들이 경력이 좀 더 있는 사람 "a few more years of experience"를 찾는다는 답이 늘 돌아옵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저처럼 신입직원들은 특히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아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예상했던 답변이지만, 매번 크게 낙담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슬프게도 늘 불운은 겹치는 법이지요. 공부도 어렵고 인터뷰도 진행이 안 되는 와중에 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요몇년새 늘 감기가 심한 두통과 함께 오는데요. 머리가 한 번 아프기 시작하면 공부는커녕 식구들 밥 차려주기도 어렵습니다. 몸도 아프고, 미래도 걱정되고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지네요. 너무 속상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제 통제 안에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잘 자고, 잘 먹으며 제 스스로를 돌보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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