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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May 21. 2024

도서관의 할머니

I'm feeling lucky.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는 중국 할머니와 드디어 얼굴을 텄습니다. 점심시간이 돼 집에 가려 도서관을 나서던 참에 도서관 입구에 위치한 상점에서 걸어 나오시는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인사할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를 두고 한 3초쯤 고민을 했습니다. 원래 ‘할까 말까 하면 해야 한다는 주의’라 미친 척하고 ‘헬로'하며 다가갑니다. ‘넌 누구냐'라는 눈빛으로 할머니가 저를 바라보시네요. 살짝 당혹스럽지만 ‘이층에서 책 보시는 모습을 자주 뵈었다’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걸게 된 상황을 설명합니다. 쑥스럽게 소개하는 저를 엄청 반가워하시며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십니다.


제 작은 용기로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됐습니다. 할머니는 스탠퍼드대 도서관에서 40년간 사서로 일하셨고, 중국 역사 특히 전쟁사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쓰셨다고 합니다. 자녀 네 명이 다 근처에 살고 늘 데리러 오는 사람은 함께 사는 아들이라고 하네요. "책을 가까이하면 젊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쓰신 책이 궁금해 검색해 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 알려주신 이름은 미국 이름이고, 책은 중국 이름으로 출판된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합니다.   


그날밤 식구들에게 할머니랑 드디어 말씀을 나눴다고 얘기했습니다. 애들 밥 해주고, 취업준비가 전부인 무료한 제 삶에 이 정도면 초특급 대박 뉴스인 셈이죠. 좋은 친구 한 명 새로 사귄 것처럼 엄청 자랑했습니다. 고맙게도 가족들은 제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고 질문도 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도서관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일부러 할머니 앞 좌석에 앉아 친한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헬로'라고 말합니다. 이런... 할머니가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넌 누구냐'의 눈빛을 다시 발사합니다. 살짝 창피해 아무렇지 않은 척 얼른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꺼냅니다. 제가 한 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의 외모는 아닌지라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약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도서관에 나와 책을 읽는 할머니와 또 마주치니 무척 반갑습니다.


할머니는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에 두 시간 정도는 거뜬히 앉아있을 수 있는 체력을 가졌고, 영어, 중국어 책도 쉽게 읽어내는 지적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근처에 함께 살며 도서관에 어머니를 모시러 올만큼 정 많은 자녀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오래 살다 보면 행복의 잣대가 ‘누구나 알만한 직장이나 통장의 잔고’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를 보며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도 열심히 들어주는 가족이 있는 제 삶도 꽤 괜찮게 느껴집니다. “I’m feeling l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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