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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Feb 28. 2022

[올레길] #8. 아빠 마음 아프게 했어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3일차, 3코스, 표선해수욕장)

오늘 아침 게스트하우스 남사장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만들어 주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다 마실 때쯤이 되니 저 멀리 수평선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가 뜨려는 모양이다. 지난 저녁 게스트하우스 여사장님의 조언대로 해비치리조트 앞까지 가서 일출을 보려고 했으나 이대로라면 해가 수평선에 걸친 모습은 못 볼 듯하고, 해 전체가 올라올 때쯤에야 도착할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장관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몇십 분 전에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걸어보자고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오늘의 일출을 제대로 못 보면 다음에 보면 되는 노릇이다. 자칫 체력적으로 무리했다가는 트래킹의 마지막 날인 오늘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기도 했다.


해비치리조트 앞 일출 스팟에 도착하니 이미 수평선 위로 해가 전부 올라와 있었다. 반쯤 걸친 모습이 어땠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모습 자체로 아름다웠다. 제주도 일출 사진은 현무암이랑 찍는 게 국룰 아니던가. 해안가에 있는 돌을 쌓아 올려 돌과 해를 한 샷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해비치리조트 앞 일출. 제주도 현무암과 함께
해비치리조트 앞 일출. 이번엔 식물과 함께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어둡게 보이던 바다가 슬슬 본연의 색인 파란색을 뽐내기 시작했다. 일출 구경을 마무리하고 다시 짐을 동여매어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어머니로부터 부재중 전화 2통이 와 있었다. 발은 아프지 않냐, 언제 마무리하냐, 무리하지 마라, 무릎은 괜찮냐 등등 그제와 어제 했던 똑같은 말을 하려고 전화하신 듯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본인 전화로 걸면 행여나 안 받을까 싶어 어머니 전화로 소심하게 전화를 걸어 봤을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안 받았으니 조금 걱정도 하셨을 것이다.


"어디?" 전화 첫마디는 저 두 글자였다. 두 글자뿐이지만 축 처진 기분에도 최대한 상냥하게 운을 떼고 있단 것을 단 번에 알아챘다. "지금 표선에서 일출 보고 이제 다시 출발하려고요." 아버지는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생각은 깊으시지만 그것을 당최 표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신다. 말씀하시는 내내 "어..", "그..." 같은 버퍼링이 많이 걸리는데, 그러다가 하려던 말을 마저 끝내지 않고 그냥 대화를 끊어버리곤 하신다. 아버지가 먼저 힘들게 손을 내미셨으니 이제 내 턴이다. 아버지가 다음 말을 고민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부지. 제주도 오는 날 기분 안 좋게 하고 내려와서 미안해요." 조금은 이상한 타이밍의 사과였지만, 지난 사흘 내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고, 아버지도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 너.. 그.. 아빠 마음 아프게 했어.." 지난 30년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며칠간의 분노와 슬픔과 서운함을 응축해서 정제하고 정제해서 만든 표현이란 걸 알았다. "요 며칠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미안하고, 일단 오늘 저녁 제주시 돌아가면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눠요." "그래. 우리 많이 생각하자". 


이렇게 단 몇 문장만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저녁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안도감, 아버지와 화해의 물꼬를 텄다는 안도감, 며칠간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고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마지막 날은 좀 더 올레길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 그 안도감들 사이로 자꾸 "아빠 마음 아프게 했어"라는 문장이 콕 콕 다시 나를 찌른다. 


우씨. 나만 자기 마음 아프게 했나. 아빠도 내 마음 엄청 아프게 했는데 말이다. 이번 갈등의 마무리는 오늘 저녁 제주시로 돌아간 나에게 미루고, 우선은 남은 올레길 여정에 집중하기로 마인드 세팅을 한다. 


하.. 이런 게 부모님 가슴에 못 박는 짓인가.. 아 근데 내 마음도 못 꽤나 박혔는데 내 마음은 누가 알아주냐. 참 난제다. 




사진 스팟이라고 만들어 둔 액자인 듯한데, 삼각대가 없어 셀카를 찍지 못했다.


높게 뜬 해가 등대를 비춘다. 


새파란 파도가 일렁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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