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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Feb 28. 2022

[올레길] #9. 나는 토마토다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3일차, 5코스, 남원읍)

우하하하. 아침 일찍 시작한 3코스를 마무리하고 4코스 초입에서 일출을 보며 걷다가 대략 시간을 보니, 이렇게 걸어서는 6코스 끝에 위치한 정방폭포까지 가는 것은 절대 무리라는 계산이 섰다. 눈을 질끈 감고 버스를 타러 간다. 4코스 전체를 버스로 지나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여행의 첫 일탈이었는데 버스 타러 가는 길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버스정류장 옆에서 해장국 한 그릇 하고 버스를 탔다. 다 먹고 나니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4코스를 달렸다. 버스를 내린 곳은 4코스의 종점이자 5코스의 시작점이었다. 걸었으면 4~5 시간은 걸렸을 거리가 버스를 타니 15분 정도 만에 끝났다. 인류 문명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감상들을 버스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인류가 얼마나 많은 생각의 기회를 놓치고 살고 있나 싶었다.



3코스를 마무리하고 쿰척쿰척


5코스는 해안선을 따라 난 현무암 길을 걷는 묘미가 있는 코스다. 길이 울퉁불퉁 험하기 때문에 중간중간 돌 위에 걸터앉아 쉬었는데 바다가 바로 코앞에 있다 보니 쉬는 것대로 또 낭만이 있었다. 돌 길을 걷다 문득 오늘이 지나고 하루 이틀 있으면 어느덧 출근할 날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왜 하필 이 좋은 곳까지 와서 회사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나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한 번 떠오른 회사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1~2년 차에는 회사에 가는 게 즐거웠다. 입사하고 거의 일 년간은 주말 중 하루를 회사에 양보해서 일도 하고 이런저런 공부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참 행복했다. 동료들한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업무적으로 성큼성큼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나에게 좋은 일자리를 준 회사가 고맙기도 했다.


올레길 5코스. 돌 위에 앉아 쉬면 신선이 된다.


2020년 말이었다. 회사가 지난 5~6년 간 해왔던 계약이 잘못되었단 것을 알아냈다. 신입 2년 차가 찾아냈다기엔 지금의 내가 되돌아봐도 참으로 기특하고, 대단한 일이었다. 내 전임자 때부터 꼬여왔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내 일이 되었으니 나 스스로 바로잡아야 했다. 2020년이 다 가기 전에 종결을 짓고자 한 달을 꼬박 08:00 출근 22~23:00 퇴근을 반복했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지만 신기하게도 행복했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이 일만 마무리되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운 것 같은 뿌듯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른 팀에서 갑자기 이 사건과 관련해서 태클을 걸어오는 바람에 일이 두 배가 되어버리기도 했고, 팀장님이 윗 선에 보고를 하자는 말에 보고서를 써갔지만 매일매일 달라지는 피드백으로 같은 보고서를 열 번 가까이를 수정했더니 마지막엔 그냥 보고를 하지 말자고 했다. 한 달쯤 지속되니 몸 컨디션이 바닥을 쳤고 눈동자가 생기를 잃은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마음이 변해서 그저 일을 빨리 매듭짓고, 연말엔 연차 2일 정도 써서 편하게 연말을 맞이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연차마저도 반납하고 12월 31일까지 이 일에 매달려야 했다그때부터였다. 회사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나는 뭐 하러 이렇게 사서 고생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18년 말 인생 첫 직장을 찾아서 여러 회사의 면접을 다니던 때였다. 당시 다른 회사의 한 면접관이 자신을 사물에 빗대어 표현해 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런 생각이 안 났는데 지인들이 '오마토'라고 부르던 게 생각이 나서 무지성으로 답변했다.


"저는 토마토입니다. 지인들은 토마토와 제 이름 오웅진을 합쳐 오마토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축구를 하면 혼자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뛰어서 생긴 별명이긴 합니다만, 어떤 활동을 하면 일을 열의 있게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서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자주 불리곤 합니다. 회사에 입사해서도 얼굴 빨개지도록 일하겠습니다!"


조금은 유치한 답변이기는 하지만 당시 내 옆 면접자들은 '우직한 돌', '곧게 서있는 나무' 등으로 답변한 것과 비교해 보면 비교적 참신하지 않았나 자위해 본다. 


그런데 요즘 그 토마토가 터질 것 같다. 누가 쿡 찌르면 즙이 찌익 나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태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문제가 뭐니 웅진아. 


첫째.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근데 더더욱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 그 걸 모르겠으면 일단 지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차선이다. 


둘째. 열심히 하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영 성에 차지 않는다. 다른 회사들은 속 시원하게 보너스도 뿌리던데 우리 회사는 사람 쥐어짜기로 참 유명한 회사다. 여기서 더 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보상이 없으니 순전히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셋째. 그럼 다른 곳을 알아볼 것이냐. 그것도 쉽지 않다. 어느덧 30살. 신입으로 가기엔 늦었다. 그렇다고 경력으로 가기엔 아직 나는 일개 사원일 뿐. 내겐 더 많은 경력개발이 필요해 보인다. 


넷째. 그래서 대체 어쩌란 거냐? 나도 모르겠다. 돈 많이 벌고, 집고 사고, 차도 사고, 화목한 가정도 만들고, 등산도 하고, 즐겁게 회사도 다니고 싶은데, 우 씨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총체적 난국이다. 1~2년 전의 나였다면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라는 말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채찍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토마토가 길을 잃고 떼굴떼굴 구르다 빵 터져서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게 될 것만 같다. 해안가를 따라서 걷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김연우의 이별택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를 크게 소리 내어 불러봤다. 목청껏 부르고 주위를 스윽 둘러봤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계속 불렀다. 가사를 잘 몰라서 같은 구절만 수십 번 불렀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달리면 어디가 나오죠 빗속을"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한라산으로 가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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