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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Mar 09. 2022

[올레길] #10. 목적지가 아니라 해도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3일차, 6코스, 쇠소깍]

5코스를 절반쯤 지났다. 오늘 하루 이미 30km 정도는 걸었다. 내 몸은 건강하니 남은 것은 내 의지와의 싸움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3일 내내 이렇게 걷다 보니 발바닥이 제발 좀 그만 걸어달라고 신음하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목표는 6코스의 끝부분인 정방폭포까지 가는 것이었으나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지체되었고 불가능한 계획이란 것을 깨달았다.


5코스 중간에서 다시 한번 버스를 탔다. 한 번 버스의 맛을 경험해 보니 그 편리함을 잊을 수 없었다. 버스는 순식간에 5코스를 가로질렀고 6코스 시작점에 내렸다. 6코스 시작점에는 쇠소깍이 있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들이 데이트 코스로 인스타그램에 자주 업로드하던 곳이다. 암벽으로 둘러싸인 물가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그 위로 사람들이 배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 되었지만 한때는 동네 꼬마들이 다이빙하며 뛰놀던 곳이었을 것이다.


쇠소깍.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것 같다.



서귀포 중간지점으로 다가갈수록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것이 체감됐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서 생각하며 걷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다. 자동차들도 늘어났고 길 위에서 자동차를 마주하면 자동차 먼저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다. 더 이상 올레길 위에서 내가 자유로운 몸이 아닌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이런 추세는 6코스 종점 정방폭포에 이를 때까지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한산해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쇠소깍을 2km 정도 지나왔을 때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여기까지다'. 다리가 겪을 고통과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받을 스트레스를 모두 종합해 봤을 때 더 걷는 것은 효용보단 비용이 더 컸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음습하긴 했지만 그것은 이제 내가 가진 노이로제라는 것을 지난 1, 2일차를 통해 깨달았다. 올레길은 평온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사색하는 곳이지 울트라마라톤을 하는 곳이 아니며, 나는 굳이 올레길에서까지 나 자신을 옥죄일 필요는 없다.


올레길 6코스를 벗어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서귀포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간 후에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고민했다. 고기국수. 고기국수. 고기국수. 따뜻한 국물과 부드러운 고기 한 점이 아른거렸다. 결심이 섰는데 버스는 20분가량 남았다.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택시를 호출했다. 문득 고기국수 한 그릇을 위해 택시비도 마다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학창시절엔 상상도 못할 사치였지만 어느덧 택시도 고민 없이 타는 경제적인 여력을 갖춘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대견했다.



올레길 여정을 마무리하기 전 마지막 바다


멋깔나게 다리를 꼬고 버스를 기다리다 결국엔 택시를 불렀다.



서귀포 올레시장에 있는 작은 고기국수집을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내 행색을 보고는 "양을 좀 많이 줄까?" 물어보셨다. 오후 3시 밖에 안되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저녁식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적당히 주시라고 말씀드렸는데 할머니가 국수사리를 한 움큼 꺼내 삶는 모습을 보고는 오늘 저녁식사는 글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든 할머니들의 손은 참 크다. 올해 102세가 되신 우리 할머니가 요리해 주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배가 더부룩해져서 며칠 괴로울 수는 있겠으나 남기지 않고 다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할머니들에겐 나름의 기쁨인 것 같다. 할머니 사장님의 정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면 한 가닥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치웠다.

 

모든 할머니의 손은 위대하리만큼 크다



식사를 마치고 서귀포 시내에서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길 건너편 버스정류장에는 많이 본 사람이 있었다. 엄마였다. 아니 엄마가 왜 여기서 나와? 엄마는 서귀포의 친척집에서 내일 차례음식을 만들고 제주시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오셨는데 놀랍게도 나와 같은 시간대에 이곳을 오셨던 것이다. 강조하지만 제주도는 작지 않다. 서울 면적의 3배 정도라고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집 근처도 아닌 제주시의  반대편인 서귀포의 버스정류장에서 어머니와 만난 것이다. "엄마엄마 버스정류장 거기 아니에요. 이쪽으로 건너와요!"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요리를 하느라, 나는 올레길을 걷느라 각자의 사정으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편하게 떨어져 앉아 한숨 자면서 갈 필요가 있었다. 엄마와 난 한산한 버스에서 서로 떨어져 앉았다.


버스에서 곰곰이 이번 여정을 되돌아봤다. 난 이 3일간 무엇을 깨달았는지 생각해 봤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이번 여정의 교훈을 리스트화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여행을 여행 그 자체로 만끽하면 됐지 꼭 가르침을 얻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것도 참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을 잠시 묻어두고 파노라마처럼 기억 속의 지난 여정을 떠올렸다.


광활한 바다를 홀로 만끽하며 걸을 수 있던 지난 3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날이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곳인지는 자동차를 타고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위치를 걷더라도 해가 위치를 조금씩 바꿀 때마다 풍경이 미묘하게 바뀌고, 또 앞에서 바라본 모습과 뒤돌아 바라본 모습도 미묘하게 다르게 다가왔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을 하는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드시 올레길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는 못하겠다. 그에 앞서 나는 올레길을 만끽하기 위해 마음 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쉬어가고 되돌아보고 사진도 찍을 여유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 여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수많은 자동차와 붐비는 사람들은 그저 스트레스 요소일 뿐이다. 나는 가끔 가던 등산마저 전투적으로 했고 산 정상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내가 걷는 길 자체를 음미한다는 것은 내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내가 걷는 길이 우수한 네이버 평점을 받은 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부족하다면 그곳은 건너뛰고 싶은 중간 과정이 될 뿐이며 의미 없는 시간이 돼버리고 만다. 네이버 길 찾기에서 출발-도착점을 찍고 네이버가 알려주는 최단거리만을 달리는 삶에서는 많은 소중한 기회들을 놓칠 수 있다. 가끔은 내가 걷고 있는 길의 중간에서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내가 지금 서 있는 길에게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서울로 돌아온 내게 지금은 새로운 의식이 생겼다. 평소에 무심코 지나던 길 중간에 위치한 가게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저 카페는 무슨 빵을 팔까? 등등 내가 걷는 길과 소통하며 걷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내가 네이버에서 알려준 예상시간보다 빨리 가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좀 더 흥미롭고 다채롭게 해주는 느낌이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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