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2일차, 21코스, 지미봉 일출)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 지난밤 45km 정도를 걸은 터라 몸이 천근만근 부서질 듯했고, 더군다나 맥주를 세 캔이나 마시고 잔 탓에 잠도 깊게 못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는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1월 1일에 못 본 일출을 오늘에라도 꼭 보고 싶었다. 10분만 더 자고 6시 10분에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겼다. 해가 7시 23분에 뜨기 때문에 6시 30분까지 택시를 타서 6시 50분에는 오름 등산을 시작해야 했다.
게스트하우스 밖을 나서니 찬 겨울바다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무섭게 불어치고 있었다. 다행히 따뜻하게 챙겨입어 그리 춥지는 않았다. 카카오택시를 켜서 택시를 호출했다. 역시 제주도였다. 택시가 잡히질 않았다. 만약 택시를 못 잡으면 숙소에 들어가 조금 더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혹하긴 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다.
쏘카가 떠올랐다. 3시간 대여에 4만 원이었지만 눈 질끈 감고 결제했다. 차 앞에 도착해 문을 열기 직전, 4만원이 못내 아까워서 카카오택시를 다시 한번 호출해 봤다. 놀랍게도 가까운 거리의 택시가 잡혔고 택시비는 만 원! 이 작은 시도가 3만원을 아꼈다. 심지어 이미 예약한 쏘카는 대여시간이 시작되고 10분 후까지 수수료 없이 취소가 가능했다. 쏘카는 갓앱이다.
택시를 타고 10분쯤 달려 지미봉 입구에 내렸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온 세상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나는 당당히 새벽 등산 때 쓰던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고 등산을 시작했다. 나를 뒤따라오던 커플도 내가 비추는 랜턴에 의지하는 듯했으나 나는 꼭 일출을 봐야만 했으므로 미안하지만 먼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10분쯤 지났을까 총 300m가 조금 넘는 등산로가 끝나고 봉우리에 올라섰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고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날은 점점 밝아지는데 이상하게 태양이 안보였다. 알고보니 구름이 빼곡하게 수평선을 에워쌓고 있었고 태양은 절대로 보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일출 그거 뭐 좀 못 보면 뭐 어때. 달콤한 아침잠도 포기하고, 새벽 찬 바람도 맞고, 택시비 만 원도 썼고, 새벽산행을 위해 무거운 헤드랜턴도 챙겨왔고, 체력도 많이 소모했지만 일출 좀 못 보면 어때. 내일 보자 일출. 내일은 반드시 구름이 없길 바랬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찬찬히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비록 해는 구름에 가렸지만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엔 성산일출봉, 왼쪽엔 우도, 그리고 파아란 바다.
지미봉 정상에는 나처럼 일출을 기다리던 제주도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 두 분이 계셨다. 그분들이 쓰는 사투리의 어감을 통해 세 분이 오늘 처음 이 봉우리에서 만난 조금 어색한 사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도에 엄청 큰 리조트 하나 들어선덴 햄수다".
"아이고 겅하면 되나? 그거 못 짓게 해야됩니다양"
"지금도 하영 복작복작한디 그거까지 지으면 안된다게"
제주도 안의 또 다른 아름다운 섬 우도에 커다란 리조트가 하나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한때 우도 여행을 하면서 숙소들이 변변찮아서 여기에 호텔 하나 지으면 돈 잘 벌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군가 당시의 내 바람을 실현할 예정인가 보다. 저 평온한 섬에 불쑥 눈에 튀는 녀석이 들어선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미봉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시선을 독점하는 녀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도를 바라보면 평탄한 섬이 이어지다 오른쪽에 우도봉이 낮게 솟아있다. 그러다 우도와 본섬을 드나드는 배가 출항해서 배 뒤로 하얀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도 오른쪽에 있는 성산일출봉도 그랬다. 성산일출봉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주위를 파아란 바다가 감싸고 있고, 그 뒤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놓여있으며 그 위에 뭉개뭉개 핀 구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주말로 뺄라진 것, 즉 잘난척 뽐내는 것 하나가 시선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만약 우도에 커다란 리조트가 지어진다면 어떨까. 부디 높게만 짓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부디 밤하늘 별을 볼 수 있게 밤에는 불을 꺼주었으면 좋겠다.
제주도에는 개발에 난색을 표하는 어르신들이 정말 많다. 산이나 해안가에 무엇인가 짓는다 하면 자기 재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혀를 끌끌 차며, "겅하면 안되주게. 자연을 겅 파괴하면 되나?"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그분들을 보며, 그런 생각 때문에 제주도의 발전이 더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어르신들은 제주에 살며 오늘의 내 감정을 오래전에 느낀 분들일 것이다. 오름 위에서 뛰어놀다, 바다에서 헤엄치다 자연스레 느꼈을 것이다. 큰 개발이 하나 시작된다면,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뺄라진 것들이 속속들이 등장할 것이고 서서히 지금의 조화가 망가질 것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오늘 지미봉에서 처음으로 그 분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나오길 20분 정도 더 기다렸지만 전혀 가망이 없어보여 지미봉에서 내려왔다. 내려오고 나니 어쩐지 너무 밝아졌다 했는데 해가 뺄라지게 떠 있었다. 산 위에서 못 본 것이 아쉬웠지만, 아마 해가 없었기에 제주를 더 많이 내려다볼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