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2일차, 3코스, 표선, 신천목장)
성산일출봉을 지나면서 1코스가 끝이 났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해안가를 벗어나 섬 안쪽으로 난 2코스를 향해 걸을 것인가, 아니면 올레길은 아니지만 언젠가 가보고 싶던 섭지코지를 걸을 것인가? 그래도 제주도 출신이면 섭지코지는 한 번쯤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올레여권에 도장 찍기를 포기하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현재 시간 오후 12시. 어제 거의 50km를 걷고, 오늘 아침 6시부터 걸어 벌써 20km 정도를 걸었다. 발바닥이 부서질 듯 아팠다. 마음은 빠른 걸음으로 온 섬을 쏘아 다니고 싶었지만 몸이 받쳐주질 않는다. 섭지코지 가는 길에서 뜬금없이 발 지압판이 나타났다.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콕콕 찌르는 듯한 발바닥 통증을 줄이기 위해 마사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압판에 올라간다. 열심히 마사지를 해줄 테니 내려왔을 땐 꼭 다 나으렴. 윽엑윽엑. 한참을 지압판 위에서 춤을 추고 내려왔는데 방금 전까지는 걸을 때 콕콕 찌르는 듯한 발바닥 통증이 안 느껴졌다. 발바닥이 안 아프게 된 것인지, 아니면 지압판이라는 더 강한 고통에 기존의 통증을 잊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까보단 덜 아팠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 것이 바로 이열치열, 이통치통.
섭지코지를 한 바퀴 돌고 나와 남쪽으로 계속 걷다 보니 2코스도 끝나고 어느덧 3코스다. 3코스는 A, B코스 두 개로 나뉜다. 3-A는 오름을 몇 개 오르내리는 20km 정도의 고난도 코스이고, 3-B는 해안가를 따라 걷는 15km 정도의 평이한 코스다. 평소의 나라면 무조건 3-A를 골랐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로 한다. '3-A를 완주해서 얻는 즐거움' vs '고통'. 둘을 비교해 보니 고통이 더 클 것임이 명확했고, 쉬운 3-B 코스로 향했다.
걸으면서 내 오른발이 갑자기 아프다고 신음했다. 발바닥은 물론이고 무릎과 허벅지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내 오른발은 고생이 참 많았다. 작년 8월 왼쪽 무릎을 다치고 수술을 하고 난 후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왼 무릎이 다시 다칠까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내릴 때 오른발을 먼저 내딛고, 방바닥에 앉을 때에도 오른발은 양반다리, 왼발은 쭈욱 펴 앉게 되었다. 자연스레 모든 부담은 오른발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도 그랬다. 그 많은 제주도 현무암 돌길을 오르내릴 때도 항상 오른발이 선두에서 고생했다. 그러니 발바닥부터 시작해 무릎, 허벅지, 골반 모두 오른쪽이 유독 아팠다.
왼발 입장에서는 참 이득이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자기는 조금 덜 일해도 다른 녀석이 다 해준다. 수술 받았다는 든든한 핑곗거리도 있다. 과연 지금 다리 상태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 이대로 오른발만 써서는 목적지까지 가기 힘들고, 간다 한들 다음날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다. 나는 왼발에게 제대로 걸어보라는 큰 임무를 주기로 했다. 돌길에서 왼발을 먼저 내디뎌 보고, 계단에선 왼쪽 허벅지 힘으로 오르내렸다. 수술 후 약골이 되었다 생각했던 왼발은 예상외로 제 몫을 해낼 준비가 잘 되어있었다. 험한 길을 걸을 때 아프지 않았고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쓰지 않아 숨죽이고 있던 왼쪽 허벅지 근육들을 오랜만에 사용하자 불뚝불뚝했는데 마치 나에게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왼발은 힘차게 걸을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내가 겁이 나서 고이 아껴두고 있었던 것일 수도?
지난 몇 개월과 이번 여정에서 왼발이 제 역할을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이토록 오래 걸을 수 있던 것은 오른발이 두 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이든 회사든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불안정한 가부장적 가정이 지속되는 것은 수십 년 간 서러움을 가슴에 묻어두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고, 월급루팡이 가득한 회사가 지속되는 것은 누군가 묵묵히 다른 사람의 몫까지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월급루팡들은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