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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Feb 13. 2022

[올레길] #7. 버선발의 사장님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2일차, 3코스, 표선, 게스트하우스)

3코스 후반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닿을 때가 되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바닷바람이 역풍으로 세게 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앞에 걸어가던 한 가족은 역풍이 뭐냐는 듯 내 두 배는 되는 속도로 가볍게 걷고 있었다. 남은 1km를 세 번이나 쉬면서 겨우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오늘 새벽 6:50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거의 10시간 정도 걸은 셈이군.


게스트하우스는 카페를 겸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지난주 에어비앤비로 예약할 때는 위치와 가격으로 필터링해서 평점이 제일 높은 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예약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숙소에 카페가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숙소란 올레길 완주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게스트하우스 안에는 사람이 없는 듯 했고, 옆에 붙어있는 카페에서 체크인을 하는 시스템인 것 같아 카페로 들어가니 사장님으로 보이는 포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께서 카페 의자에 잠깐 앉으라고 했다. 바로 체크인해서 얼른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카페에 잠시 머무는 것이 이 게스트하우스의 룰인가 싶어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은 웰컴티를 한 잔 내어주겠다고 하셨는데 웰컴티라는 것을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터라 기분이 묘했다. 웰컴티를 건네주시며 차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는데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르릅. 눈을 살포시 감고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을 만끽한다. 후르릅. 따뜻함이 목에서 배 아래로 천천히 전달되는 느낌이다. 자연스레 한 마디 나온다. 크으으 좋다. 후르릅. 온 몸이 나른해진다. 눈을 잠깐 감았는데 잠들 것 같다. 하지만 체크인을 해야 되니까 다시 눈을 크게 뜬다. 후르릅. 후르릅. 후르릅. 하 좋다. 


유자차인듯 새콤달콤한 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페에는 사장님과 친한 단골로 보이는 손님들이 몇 있었다. 사장님은 갓 구운 빵과 손수 만든 귤잼을 상에 차리시며 단골들과 나에게 한 입 권하셨다. 숙박비가 2만 원 조금 넘는데 웰컴티에 빵까지 나온다니 가성비 최고의 게스트하우스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사장님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분에게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라고 요청했다. 이 남자분은 동업하는 사장님일까, 직원일까, 동생일까, 남편일까.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그냥 남자 사장님이라 부르자. 나는 단지 뜨거운 물 샤워가 빨리하고 싶을 뿐이다. 


가정집을 이용한 게스트하우스. 오히려 편했다.


설 연휴이다 보니 6인실 방을 나 혼자 쓰게 됐다. 건너편 여자방에도 손님이 없었던 것 같은데 괜히 나 때문에 오늘 영업을 해서 귀찮게 해드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딱 봐도 인심 좋아 보이는 사장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것 같진 않았다. 뜨신 물로 샤워를 하고 주변 식당에서 2인분 고기를 해치운 후 숙소에 돌아왔다. 어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기를 좀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맥주자리가 열려 쓰지 못한 게 떠올라 카페로 갔다. 손님은 없었고 두 사장님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아이고 식사 중이시네요, 앉아도 되죠? 그럼요. 여사장님은 식사를 하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 충전도 하라고 콘센트가 있는 테이블을 치워주셨다.


"저는 어제 조천에서 시작해서 세화에서 자고, 오늘 이틀 차인데 여기까지 왔네요. 하루에 2~3코스씩 걸은 셈이죠"


회사나 친구들 사이에서 이 말을 했으면 마치 영웅담 같았을 것이다. 이틀 만에 거의 90km를 걸었으니 가히 내 건강함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하다. 그런데 이 카페에 앉아 사장님께 내 얘기를 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니 내가 봐오던 반응과 사뭇 달랐다. 평소대로라면 눈이 똥그래지며 '오오'하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아뿔싸, 순간 내 이번 여정이 자랑스럽기는커녕 치기 어린 초보 행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카페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랄까? 이곳의 사장님이나 이곳을 들른 손님들을 짧게나마 지켜본 바로는, 올레길을 나처럼 죽자 살자 완주하겠다고 달려들 것 같지 않았다. 시간 날 때마다 한 코스 한 코스 천천히 걸으며 만끽하는 고수들 같아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듣고 여사장님이 한마디 하셨다. 올레길은 하루에 한 코스 정도 천천히 돌고 사진도 찍으면서 걷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번에 올레길을 걸으며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눈앞에는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경관이 펼쳐져 있음에도 빠듯하게 잡아놓은 일정으로 인해  빠르게 지나쳐야만 했다. 길은 평온한데, 그 길을 걷는 나는 조급하고 고통스러웠다. 천천히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녁 8시, 카페 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러가기 때문에 조식을 먹지 않겠다 말씀드렸더니 조식을 챙겨주지 못해 찝찝하다며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한가득 챙겨주셨다. 침대로 돌아와 저녁 9시 즈음 곯아떨어졌고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문 밖을 나섰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나오는 소리에 깨신 걸까. 남자 사장님이 나를 뒤에서 부르더니 버선발로 허겁지겁 뛰어나오셨다. 그리고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만들어 내게 건네셨다. 이른 새벽 추운데 따뜻한 차 한잔 하면서 가라고.


두 사장님을 닮아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구월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만들어주신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픈 다리를 이끌고 일출을 보러 가는 길 위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웰컴티, 갓 구운 빵과 손수 만든 귤잼, 도란도란 수다를 떨 수 있는 단골손님들, 조식을 못해줘 아쉽다며 챙겨주신 간식거리, 버선발로 뛰어나와 만들어주신 아메리카노. 여러모로 내가 살아온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을 담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지친 내게 여유를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지만, 빠듯한 일정에 쫓기던 나는 전혀 여유를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해가 밝아오며 셋째 날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장님 말씀을 새겨담아 오늘은 좀 여유를 갖고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오늘은 이 게스트하우스에 조금은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올레길을 걷고 싶었다.


하늘아래 모든 것이 평온하듯 조급한 내 마음도 오늘은 여유를 갖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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