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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Feb 13. 2022

[올레길] #6. 왼발이 아프면 오른발이 고생한다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2일차, 3코스, 표선, 신천목장)

성산일출봉을 지나면서 1코스가 끝이 났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해안가를 벗어나 섬 안쪽으로 난 2코스를 향해 걸을 것인가, 아니면 올레길은 아니지만 언젠가 가보고 싶던 섭지코지를 걸을 것인가? 그래도 제주도 출신이면 섭지코지는 한 번쯤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올레여권에 도장 찍기를 포기하고, 섭지코지로 향했다.


현재 시간 오후 12시. 어제 거의 50km를 걷고, 오늘 아침 6시부터 걸어 벌써 20km 정도를 걸었다. 발바닥이 부서질 듯 아팠다. 마음은 빠른 걸음으로 온 섬을 쏘아 다니고 싶었지만 몸이 받쳐주질 않는다. 섭지코지 가는 길에서 뜬금없이 발 지압판이 나타났다.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콕콕 찌르는 듯한 발바닥 통증을 줄이기 위해 마사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압판에 올라간다. 열심히 마사지를 해줄 테니 내려왔을 땐 꼭 다 나으렴. 윽엑윽엑. 한참을 지압판 위에서 춤을 추고 내려왔는데 방금 전까지는 걸을 때 콕콕 찌르는 듯한 발바닥 통증이 안 느껴졌다. 발바닥이 안 아프게 된 것인지, 아니면 지압판이라는 더 강한 고통에 기존의 통증을 잊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까보단 덜 아팠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 것이 바로 이열치열, 이통치통. 


윽엑윽엑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에서 야인같은 행색의 남성이 지압판을 걷고 있으니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섭지코지를 한 바퀴 돌고 나와 남쪽으로 계속 걷다 보니 2코스도 끝나고 어느덧 3코스다. 3코스는 A, B코스 두 개로 나뉜다. 3-A는 오름을 몇 개 오르내리는 20km 정도의 고난도 코스이고, 3-B는 해안가를 따라 걷는 15km 정도의 평이한 코스다. 평소의 나라면 무조건 3-A를 골랐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로 한다. '3-A를 완주해서 얻는 즐거움' vs '고통'. 둘을 비교해 보니 고통이 더 클 것임이 명확했고, 쉬운 3-B 코스로 향했다.


걸으면서 내 오른발이 갑자기 아프다고 신음했다. 발바닥은 물론이고 무릎과 허벅지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내 오른발은 고생이 참 많았다. 작년 8월 왼쪽 무릎을 다치고 수술을 하고 난 후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왼 무릎이 다시 다칠까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내릴 때 오른발을 먼저 내딛고, 방바닥에 앉을 때에도 오른발은 양반다리, 왼발은 쭈욱 펴 앉게 되었다. 자연스레 모든 부담은 오른발에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도 그랬다. 그 많은 제주도 현무암 돌길을 오르내릴 때도 항상 오른발이 선두에서 고생했다. 그러니 발바닥부터 시작해 무릎, 허벅지, 골반 모두 오른쪽이 유독 아팠다. 


왼발 입장에서는 참 이득이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자기는 조금 덜 일해도 다른 녀석이 다 해준다. 수술 받았다는 든든한 핑곗거리도 있다. 과연 지금 다리 상태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 이대로 오른발만 써서는 목적지까지 가기 힘들고, 간다 한들 다음날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다. 나는 왼발에게 제대로 걸어보라는 큰 임무를 주기로 했다. 돌길에서 왼발을 먼저 내디뎌 보고, 계단에선 왼쪽 허벅지 힘으로 오르내렸다. 수술 후 약골이 되었다 생각했던 왼발은 예상외로 제 몫을 해낼 준비가 잘 되어있었다. 험한 길을 걸을 때 아프지 않았고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쓰지 않아 숨죽이고 있던 왼쪽 허벅지 근육들을 오랜만에 사용하자 불뚝불뚝했는데 마치 나에게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왼발은 힘차게 걸을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내가 겁이 나서 고이 아껴두고 있었던 것일 수도? 


지난 몇 개월과 이번 여정에서 왼발이 제 역할을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임에도 이토록 오래 걸을 수 있던 것은 오른발이 두 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이든 회사든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불안정한 가부장적 가정이 지속되는 것은 수십 년 간 서러움을 가슴에 묻어두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고, 월급루팡이 가득한 회사가 지속되는 것은 누군가 묵묵히 다른 사람의 몫까지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월급루팡들은 명심하자!


평온해 보이지만 제주바다의 역풍에 좌절하고 싶었다.
하얀 하늘 아래 귤피를 말리고, 이 모습을 한라산이 내려다본다. 
자동차도, 사람도 없는 길가에 한참을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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