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겠다는데 외않되!
오랜만에 혜화에 가서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다. 날이 화창해서 사랑이야기를 듣고 보기에 최고인 날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꼴을 하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평소 콘서트 덕후인 나는, 내가 보러 가는 것이 연극이라는 점을 잊은 채 덜컥 1열을 예매했다. 그 탓에 극을 보는 내내 모가지가 조금... 아팠지만 배우들의 호흡 하나하나까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기에 대체적으로 만족한 1열 관람이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서 느껴지는 그 민망함은 조금 참을 수 없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줄리엣과 줄리엣>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집안의 두 소녀가 파티에서 서로를 보고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기존 셰익스피어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틀기 한 작품으로 달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장면, 약을 먹고 쓰러진 연인을 보고 자신도 칼로 찍어 죽음에 이르는 장면 등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 속 이야기는 원체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아닌 줄리엣과 줄리엣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가 아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여 변형된 이야기이고 실은 줄리엣과 줄리엣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이 극 중 설정이다.
극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엣 몬테규는 로미오라는 남동생을 가지고 있고 여성을 사랑하는 소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토로한다. 그렇다, 부드러운 살결과 좋은 향기가 나는 목덜미, 털이 많지 않은 몸, 타고난 다정함과 같은 것은 여자가 제일이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지극히 이분법적인 생각이겠지만)
극 중에서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수치스러운 일, 가능하지 않은 일임과 동시에 줄리엣 몬테규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에게 있어 어느 여자가 남성을 사랑하여 아기를 낳고 사는 것이 행복의 제일로 여기는 것처럼, 나와 같은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그 여성과 영원의 사랑을 맹세하는 일은 생각보다 크게 다른 일이 아니다. 또한 극 중 시대 상황은 16세기 베로나 시대임에도 불구, 지금 현대사회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듯 그녀들은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서로에게 무섭게 빠져들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둘의 사랑을 맨 눈으로 보고 있자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계속 벅차올랐다. 사실 이건 뻔할 뻔 자의 사랑 이야기임에도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여여의 사랑 이야기가 되니 둘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세상의 장벽이 유독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 견고함이 이루 말할 데 없어서, 보이지 않는 벽에 나까지 숨이 막히곤 했다.
그녀들은 반지를 나눠 끼고 수도승의 주례 아래 결혼식을 올린다. 사랑을 시시각각 변하는 달에 맹세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들 자기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나의 사랑 줄리엣에게 역시 나의 사랑 줄리엣에게.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도망쳐 살아갈 집을 구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보수적임과 동시에 꽤나 진보적인 설정들이 극 곳곳에 묻어있다.
꼭 그렇게 죽였어야만 했냐!라고 말하고 싶은 앤딩이었다. 하지만 죽음으로서 서로의 사랑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두 소녀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 소설이 이렇게 탈바꿈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기발하네. 그리고 자꾸 눈물이 나네. 마지막 장면까지 눈물을 훔치고는 조용히 울지 않은 척했다.
아직도 온갖 퀴어 이슈들에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 꼬리처럼 따라다닌다. 마치 그 단어를 가져다가 쓰면 자신을 방어하는 방패막이라도 되듯 정치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져다 쓴다.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는 편하게 가져다 쓰고 소모되서는 안 되는 단어다. 사랑을 하겠다는데 누군가의 합의가 필요하다면 그 사회는 그 누군가에게 또 다른 지옥이 아니겠나. 어디선가 죽어버린 줄리엣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고. 우리들의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