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이문영
_"일을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국어사전에서 '부끄럽다'의 뜻을 찾아 옮겨 적었다. 몇번이고 되읽었다. 이보다 나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없는 듯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온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고, 여전히 "부끄러운 것이 많"은 오늘의 내가 부끄러웠고, 앞으로도 "부끄러운 것이 많"은 채로 살아가리라 예상되는 미래의 내가 부끄러웠다. 이런 부끄러움은 익숙해지지 않고 부끄러울 때마다 새삼스럽다. 어쩌면 익숙해짐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익숙해지다 못해 만성이 되어버린 나머지 버릇이나 습관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면 안되니까. 왜, 무엇이 부끄러운지도 모르면서 부끄러워하면 안되니까. 세상 일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덤덤히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면 안되니까.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게 들렸을 때. 아니, 보지 않았던 것을 보고, 듣지 않았던 것을 들었을 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보고,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부끄러운 것이 많"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것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보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며 고개 숙이는 사람을 더 믿게 되었다.
_"부끄러운 것이 많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언젠가 <노랑의 미로>, <웅크린 말들>을 읽은 뒤 나는 그를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은 그의 첫 소설인 이 책을 읽고 더욱 깊어졌다.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걸쳐 있"(p.316)는 이야기는 나를 자꾸 멈추게 만들었다. 기꺼이 스스로를 고난에 몰아넣는 구도자처럼 집요하리만큼 '제대로' 듣고자 애쓰는 주인공의 간절함이 연신 나를 붙잡았다. 부끄러움과 무력감에 짓눌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책에서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다음 문장을, 또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있었던 나는 생각했다. 운 좋게도 들을 귀와 볼 수 있 눈을 가진 나는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고 있는가. "사실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듣"(p.300)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제대로 보지 못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세계"(p.146)에서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나는 정말이지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이다.
_"서로의 고통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추락이었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길 멈춘 사람이 괴물이 됐다. 괴물은 내 안에 있고, 당신 안에, 우리 안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밖에도 있었다."(p.146)
"실제와 망상을 가르는 경계가 사실이 아니라 자기 확신일 때 실제와 망상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p.251)
"어떤 천재지변은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쉽게 찢기는 땅과 삶을 골라내는 눈이 지진에겐 있었다."(p.288)
"듣기에 자신이 없어진 뒤로 나는 무언가 듣고 나면 나 자신부터 의심했다.(...)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나는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사실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듣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소리는 단순해지고, 확신은 편리해지고, 세상은 완강해졌다."(p.300)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논픽션과 픽션 사이에 걸쳐 있었다. 차라리 소설이길 바라는 이야기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때가 많았고, 현실은 정말 현실일까 믿기지 않을 만큼 소설 같을 때가 많았다."(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