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치와 재발 사이,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한 번 이겨내본 시련은 언제든 다시 이겨낼 수 있다고 하던가요
희망적으로 들리는 응원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세상의 파도는 때때로 이겨냈던 시련임에도 일상을 휩씁니다
오늘의 하루가 그랬습니다.
8년차 궤양성대장염 환자, 15년차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증 환자
이런 부연 설명을 거의 잊은 것은 거진 반 년간의 멕시코 생활 덕분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첫 학년을 암흑으로 덮었던 염증성 장질환을 슬기롭게 타넘었던 덕인지
대학에 진학하여 지구 반대편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쓸 일이 있을까 싶었던 시기도 잠시, 한 학기로 생각하던 교환학생 생활이 두 학기로 늘었고
스페인어 실력도 한뼘 한뼘 자라나는 것을 보며 느낍니다
혹시나 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능숙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어렵던 것들에 조금씩 도전하면서 하나하나가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도 그랬습니다
무슨 말을 할지, 아니 말은 할 수 있을지,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어느새 이 대륙에 아는 친구가 300명이 넘습니다
졸업이 어렴풋이 눈에 보이고 진로 고민이 컸던 요즘 시기
이런 변화가 어떠한 다른 길의 초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열심히 실마리를 찾아나섰습니다
모르지요, 이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뛰어다닐지
혹은, 한국 본사와 해외 법인을 잇는 주재원으로 활약할 수 있을지
이국 타향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 행사를 도우며 재외공관에서 일할지요
그런 생각이 어느새 구체적으로 실체를 갖춰나갈 무렵
잠잠하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화장실에 갔을 때 피를 보았습니다.
한동안 존재를 잊고 살았을 정도로 건강했기에
아니 건강하다고 생각했기에 오늘 본 피에 충격이 있네요.
잘못 보았는지 전날 붉은 음식을 먹었는지 돌아봅니다
일회성인지 이후 반복이 될 수 있을지도 생각해봅니다
경우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테고 심하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할지도 모르지요
N년 이상의 해외 파견 근무도 생각하고 있던 입장에서
갑작스런 선회가 당황스럽지만 돌아보면 그동안은 참 운이 좋았습니다
여태껏 아무런 이상이 없던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이 생각나지만
지금은 지구 반대편 타지에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검사 하나없인 이유를 모르는데 제가 짐작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중요한 건 앞으로 입니다.
앞으로도 두 질환은 저와 함께할테고 어느 순간 지금처럼 다시 혈변을 볼지 모릅니다
그 점을 감안하여 진로를 선택하고 인생을 그려나가야겠지요
이미 이겨낸 적 있었던 질환이라고, 약만 잘 먹으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쉽게 넘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마주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꾸만 잘못 본 것이라고, 혹은 그럴리 없다고 상황을 부정하게 되네요
아무튼 다시 이런 상황을 마주했으니
다시 기대치를 낮추고 건강한 선택을 더더 쌓아나가면서 스트레스를 줄여야겠습니다
능숙하게 이겨내지는 못해도 익숙하게 다시금 이겨내려 노력해보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