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잔재주모음집 02.
-
다소 과한 감이 있지만, 나는 항상 일상 속 평범한 것들에 의미 부여를 잘하는 편이다.
우연한 발견, 우연의 일치, 우연한 만남을 운명적인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러한 의미 부여와 확대 해석이 싹을 틔워 일상에의 위로와 새로운 동력이 되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2박 3일간의 즉흥적인 제주 여행.
이 여행의 시작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6주간의 전환형 인턴 생활을 정제된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거지로 몇 단어 끌어내 보자면
'무력감', '비관', '소시오패스' 정도가 될 것이다.
내 능력이나 노력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휘둘리는 무력감,
그동안 믿어 왔던 나의 장점과 가치를 의심했던 비관적인 상황,
겉으로는 너무 좋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욕지기가 솟아, 나 스스로 소시오패스는 아닌가 고민하게 만들었던 순간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찰나
6주짜리 인턴십은 마무리되었고, 같은 인턴을 했던 친구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현실 도피를 위해 슬쩍 찾아본 제주행 비행기표는 왕복 2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다.
이미 떠나기로 결정되어 있던 마음에 트리거를 당긴 셈이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기 약 12시간 전에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매했다.
숙소의 이름은 '콤포스텔라 별들의 들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돌아오신 사장님 부부가
순례길 코스 중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인 듯하다.
물론 순례길을 걸어본 적 없는 나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인터스텔라 같은 건가?'하고 생각했던 기억.
그냥 숙소가 저렴해서 빠르게 예약해버렸다.
도심에서 꽤나 멀어,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미처 몰랐지.
-
우연히 떠나온 8월의 제주는 아직 꽤 더웠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서울의 날씨를 생각해 긴팔을 가져갔다가 낭패를 봤다.
습했고, 또 뚜벅이 여행자 특성상 많이 걸어야 한다는 걸 간과했다.
게다가 제주 사람들은 이미 이런 날씨에 익숙해져 있는지 에어컨도 제대로 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 내내 약간의 습함과 끈적임이 계속 따라다녔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이 일종의 고행과도 같이 느껴졌다.
더위에 취약한 나는 혹여나 이 더위로 인해 내 마음속에 내재한 짜증이 행동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굉장히 신경 쓰였다.
최근 나는 부쩍 짜증이 늘어있는 상태였다.
분명 최선의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퇴사'라는 선택이 너무 섣불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30살이 아닌 게 어디냐며 위로했지만
30살이 코앞인 지금의 상황에서 또 전환형 인턴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스트레스였고,
도움 주지는 못할망정 계속해서 도움만 청하는 주변 상황에도 어느 정도 넌덜머리가 나 있던 상황에서
어쭙잖은 위로랍시고 던지는 말들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에게 좀 놀랄 정도였다.
확실히 나는 여유가 없었다, 실질적인 시간의 여유가 되었건 마음의 여유가 되었건.
-
여행은 즐거웠다.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이동에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즉흥적으로 고른 목적지가 주는 즐거움도 컸다.
즉흥적으로 고른 마지막 목적지는 '바라나시 책골목.' 인도 느낌을 살린 작은 북카페였다.
제주 공항 근처에 있어, 서울로 돌아가기 전 잠시 시간 때울 겸 찾아간 곳이었다.
인생에 대한 고민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 세상 만물을 다루는 책들이 주로 있었다.
책들은 대체로 사람의 손때가 묻은 중고책이었고,
카페 내에서 편하게 읽다가 원한다면 저렴한 가격에 구매를 할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책이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였다.
이름은 몇 번 들어본 책이었다.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냥 왠지 그 책이 끌려서 집어 들어 자리에 앉았다.
자유로운 사장님(가게 안쪽 깊은 곳에 조용히 숨어 계시다가 손님이 오시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중 나와 주문을 받고,
다시 돌아 들어가시는 모습이 굉장히 자유로워 보여 '자유로운' 사장님으로 이름 붙였다)에게 주문한
인도식 짜이 한 모금을 마시며 10장이나 읽었을까?
'콤포스텔라'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느 날 밤 양치기가 들판 위에서 빛나는 별을 봤다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인터스텔라 친구쯤 되는 줄 알았던 콤포스텔라의 의미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몇몇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카페 곳곳에 놓인 노트와 연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뭐에 홀린 듯 필사를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옮겨 적은 <순례자> 속 내용 중 하나이다.
'당신은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처음엔 여행이 고문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여행이 기쁨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지요. 그것은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가장 중요한 당신의 꿈들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
그 문장을 읽으면서, 좀 우습기는 하지만, 이 여행의 퍼즐이 맞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골랐던 숙소의 이름 '콤포스텔라'부터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은근한 찝집함과 2시간이 넘는 자전거 타기, 반복되는 걷기,
여행의 마지막에 시간이 남아 우연히 들른 북카페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고르고, 그 책 속에서 이런 문구를 만나기까지.
나에게 이 한 줄의 깨달음을 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목적지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여정이 두렵다.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여유 시간일 뿐이고,
원치 않은 만남으로 목적지로 가는 시간이 늦춰질 수도,
잘못된 선택으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불안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넓히면 말은 달라진다.
의심의 과정을 통해 상상력은 커질 테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옳은 선택은 아닐 수 있지만, 그 선택의 끝이 결국 목적지를 향하기만 한다면 상관없다.
여정 그 자체에서도 충분히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며,
여정에 행복감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꿈 역시 더욱 다채롭고 풍성해지는 것이리라.
비슷한 맥락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에 노을이 멋지게 지는 스팟을 찾을 수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깊숙한 곳에 숙소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숙소 옥상에 누워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도, 떠오르는 아침 해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도 나는 충분히 좋은 것들을 보고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난 목적지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을 노트에 옮겨 적었고, 고작 40페이지를 읽으며 노트 5장 분량을 필사했다.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문구가 많은 책은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책 뒷면 가격표를 살펴 보니, 4천 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4천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순례자의 값진 경험을 살 수 있다니,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 <순례자>를 구매하며, 나의 2박 3일 '우연하고도 평범한' 제주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짜이를 주문할 때 사장님께서 함께 주신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리고 <순례자>에서도 주인공이 똑같은 내용의 대사를 뱉는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배는 움직여야 하고, 또 움직일 것이다.
'불안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평화'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