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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Aug 12. 2020

가깝지만 먼 우리. 「붕대감기」

다른 관점으로 보는 여성서사



 영화와 책은 대중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즐기는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나 작품의 중심은 남성에게로 치우쳐있다. 여성은 사랑받거나, 예쁘거나, 어머니거나, 섹시해야만 작품에 등장할 수 있다.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남성과의 관계 속의 존재다. 우리는 작품에 등장할 수 있는 어떤 요건도 충족시킬 마음이 없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고 남성에 억지로 감정이입해 몰입하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서사는 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문화생활을 위해 절실하다. 더 많은 여성서사를 함께 즐기고, 여성 창작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 코너를 마련했다. 언제나 중심에서 한 발 밀려난 여성에게 포커스 맞춘다. 현실에서든, 작품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여성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fiction
붕대감기
2020.01 출간
윤이형 저자




혐오가 자연스러워진 이유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는 지현은 손님으로 온 은정의 아이가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자 속으로 ‘한남 유충, 재기해, 죽어, 유병장수’ 같은 말들을 떠올리며 SNS에 아이와 은정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그 사건 이후 오랜만에 미용실에 초라한 모습으로 온 은정에게 아이가 정체 모를 원인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꼭 자신의 저주가 실제로 일어난 것만 같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지현은 미용실 실장님 해미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잘못한 건 그 아이와 아이를 말리지 않은 은정인데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고. 도덕 코르셋을 벗지 못해 안달인 착하지도 않은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냐고.


 지현의 마음이 이해간다. 우리는 그동안 ‘착해서’가 아니라 ‘착함을 강요당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남자 짝꿍이 괴롭혀도 ‘그 애가 너를 좋아해서’라는 이유로 참는 것을 강요당했고 커서는 스토커나 성추행은 짧은 치마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을 들으며 조금도 변화 없는 세상 속에서 자랐다. 너무 화가 나서 참지 않고 불편함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인정 없는 싸가지. 독한 년’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이미 많이 경험했다. 착함이, 참고 넘어가야 하는 인내심이, 넓은 이해심이 달리 딸들에게만 강요되어 왔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착하지 않은 행동이 꼭 죄악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지만 도덕을 버리는 것이 곧 코르셋을 벗어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혐오하는 것이 혐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아닌 것처럼, 비도덕 한 행동과 혐오가 당연해서는 안 된다. 그건 빼앗긴 것을 되찾는 과정이 아니라 되려 내 것을 도려내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는 ‘탈코르셋’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회 공중도덕과 인간적인 도리를 일부러 털어내려 노력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지현의 토로에도 물론 공감할 수 있지만, 내가 저주한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도 당연히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여성으로 자라왔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혐오가 자연스러워진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탈코르셋의 과정에 서 있는 지금,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 지 점검해 봐야 한다. 진정한 탈피는 그 고민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익명의 파도

 

 SNS에서 익명으로 만난 우리들은 면전에서는 차마 할 수 없던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질 필요도 해명할 필요도 없다. 만약, 여러 사람이 몰려와 악성댓글을 달거나 리트윗이 되어 여기저기 내 글이 박제되고 조롱 되거나 팔로워 수백 명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계정을 삭제하면 그만이다. 그만큼 현실성 없고 신빙성도 없으며 몇 초면 사라지는 허무한 공간이 바로 SNS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비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이 안의 말들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크나큰 재앙이 닥친 것처럼 열을 올리고 맥락 없는 혐오를 이어간다. 잘 생각해보면 나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말에 왜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SNS에 집착하지 말라고요? 저는 못 해요. 우리가 현실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요.'


 세연의 인터뷰 대상 학생이 한 말이다. 현실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SNS로 몰아넣고 있다. 여성들은 자주 침묵을 강요당하고 가질 수 있는 발언의 기회가 적다. 그 적은 기회를 통해 나온 말마저도 쉽게 조롱당하고 더 많은 검열과 재단 혹은 차단을 겪는다. 이미 여러 번 겪고 배운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학생의 말이 ‘불만 섞인 토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했다는 느낌도 든다.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은 딱히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대전제이다. 현실이 힘들고 우리의 공동목표가 가끔은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것처럼 멀리 보여도 우리의 행동이 불만 혹은 토로에 그치지 않아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를 태운 배가 앞으로 나아갈 방법에 대해 토론하는 상황에서 험한 파도에 욕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모적인 일이다. 답답함을 호소하는 용도로 SNS를 활용한다면 그 글은 어떤 누가 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문제의 논점과 내 생각을 잘 표현한 건강한 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하나의 토로가 모여 곧 우리의 담론 전체를 대변하기도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꼬투리가 되기도, 그래서 거대하게 불어난 오해를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고 욕이나 저주 같은 말들은 당장, 이 순간 내 화를 풀어줄 뿐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지루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토의가 아닌 토로의 방식으로 발전한 어떤 사상도 없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우리 사이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보다 눈에 불을 켜고 차가운 언어로 대화해야, 파도보다는 배에 집중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붕대가 모자라도


 진경과 세연은 고등학생 시절 교련 시간에 짝이 되어 붕대 감기 시험을 본다. 세연이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감는 데 세연이 너무 긴장한 탓에 붕대를 원래 감아야 하는 것보다 한 바퀴 더 감아버려 붕대가 모자랐다. 당황한 세연이 붕대를 콱! 당기자 진경이 악! 소리를 질렀고 반 아이들은 그들을 보고 비웃었다. 그 당시 세연은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에 그 웃음들은 세연을 민망하게 하려는 질타 섞인 웃음이다. 진경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내가 머리가 좀 커. 붕대가 모자랄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웃기니?'


 진경과 세연은 함께 성장하며 서로가 참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연은 단호하며 냉철하고 생각이 많으며 그래서 쉽게 속내를 비치지 않고 남들을 관찰하며 편견을 만든다. 그리고 그에 비해 진경은 가볍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길 좋아하며 남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세연은 진경을 참 좋아하지만 자주 그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침묵했고 진경은 그런 세연이 답답했으며 둘은 멀어지는 사이를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피곤한 일이잖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말이야. -글쎄, 왜 그럴까. 나도 날 모르겠어.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 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게 해야 해? 좀 기다려 줄 순 없는 거니?'


 그래도 둘은 진경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관계를 이어간다. 고등학교 때는 일기장에, 지금은 SNS로 서로의 글을 보며 댓글을 달진 못해도 상대의 생각을 읽는다. 여전히 답답하고 섣불리 반응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쌓이고 상대의 진심을 알아갈수록 천천히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툭 털어놓게 된다. 나는 정말 네가 이해 가지 않는다고. 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우린 승객이었을 뿐, 그동안, 이 버스에서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스스로 운전을 할 기회가 주어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거겠지. 방향 하나하나, 신호 하나하나, 승객들 한 명 한 명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까. 세연이 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될 거잖아. 나는 아무 이름도 갖고 싶지 않고, 끼워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단지, 표를 사는 법을 몰라서, 멀미가 너무 심해서,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아니면 그냥 길을 잃어서, 멍한 얼굴로 읽을 수 없는 노선표를 들여다보며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자기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고 외로워서 그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 다가가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줄 거야. 그 사람들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세연의 말대로 남을 이해하려는 일은 힘들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설득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한목소리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각기 다르다는 인정이 필요하다. 네 생각은 그렇구나. 하고 인정해 주는 것. 그저 거기 그 자리에 두는 것. 그 이상 오해하지도 탓하지도 말고 그냥 그 사실은 거기 두고 우리가 가진 공통점에 집중하는 것. 남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학습되어 왔던 인내심, 넓은 마음, 참을성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 같은 정류장에 서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서로를 이미 이해한 걸지도 모른다.


 각자만의 붕대가 있다. 내가 가진 붕대는 짧을 수도 길 수도 있고, 그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면 애초에 내 손에 붕대가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세연처럼 짧은 붕대로 상대의 머리를 감으려다 모자랐던 경험이 누군가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혼자 쪼그라들고 괜히 울적했던 날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진경이 괜찮다는 말로 그를 다독였던 것처럼 붕대가 모자라도 억지로 당길 필요도, 남는다고 잘라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서로에게 붕대를 감아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감췄던 상처를 드러내고 서로를 치료해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길 오차 같은 건 교련 선생님에게나 지적받을 일이지 누구도, 물론 우리 스스로도 비난할 수 없다. 지금 친구의 붕대가 조금 짧은 것 같다면, 혹은 내 붕대가 짧은 것 같아 친구에게 감아주기 힘들 것 같아 망설인다면 여기 또 다른 붕대를 가진 내가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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