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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Jul 14. 2020

쑥스토리; 어느 50대 여성의 인생 이야기   

[0-19세] 원치 않는 아이부터 꿈 없던 고등학생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 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쑥스토리는 가부장제 아래 태어난 어린 여성의 이야기이자, 두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야기이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사회에 내던져진 여성의 이야기이자, 사회를 바꾸려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1호부터 3호까지 그의 인생을 나이별로 나누어 듣는다.  




# [0-19세] 원치 않는 아이부터 꿈없던 고등학생까지.


[0-19세] 원치 않는 아이부터 꿈 없던 고등학생 까지.


엄마는 날 낳으려고 하지 않았다.

[0-19세] 원치 않는 아이부터 꿈 없던 고등학생 까지.

 엄마는 날 낳으려고 하지 않았다. 옛날엔 애 키우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작은오빠(셋째)를 낳기 전에 아이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병으로 죽어서. 그다음 나온 작은 오빠는 태어나자마자 또 많이 아파서. 그래서 엄마가 낳기가 싫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제대로 된 피임 방법을 잘 몰라서 한약방에 가서 애 없어지는 약도 먹고 그랬다고 한다. 그렇게 싫었는데도 어떻게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있어서… 그냥 낳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날 낳았을 때 다들 기뻐하거나 그런 게 없었다. 죽일 순 없으니까, 태어나면 키워야 하니까, 뭐 그런 심정이었다고 했다.


 태어났을 때의 분위기는 그저 그랬지만 크면서는 나름 예쁨 받고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쯤부터 운 좋게 아버지가 자식 키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에 젊었을 때는 직장생활을 하며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터울이 많이 나는 큰오빠와 언니와는 달리, 그리고 아팠던 작은 오빠와는 달리, 크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예쁨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웃어주고 하니까 그게 좋아서.


 가족 안에서 나의 역할은 분위기 메이커였다. 큰오빠나 아빠 때문에 생긴 엄마의 근심과 걱정을 들어줘야 했고, 아빠가 퇴근하면 재잘재잘 떠들어서 기쁘게 해줘야 했다. 그걸 원해서 했다기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웃어주고 하니까 그게 좋아서 계속했다. 사춘기가 되면서는 안 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 그냥 참았다. 내가 좋은 분위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게 있어도 티를 안 내려고 한다. 가끔 쌓이고 쌓여서 한꺼번에 폭발되긴 하지만.


 여자는 착하고 조용하고 얌전하고 말도 잘 들어야 한다는 압박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지금도 무슨 이야기를 하거나 발표를 할 때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는 것 같으면 말문이 막히고 기가 죽는다. ‘너는 네 주장을 끝까지 할 수 있다.’ 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면 주변의 반응을 그렇게 과하게 살피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더 심하게 얘기하거나 세게 말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일종의 부작용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언니는 존재감이 없었다. 큰오빠는 항상 자기 멋대로였다.


 우리 집안은 대가족이 다 같이 살아서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엄마는 3대 가족의 삼시세끼를 차리느라 항상 힘들어했다. 겸상도 당연히 못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큰오빠, 작은오빠까지 저 위에서 한 상, 나랑 엄마는 밑에서 조금만 상을 펴서 먹었다. 순서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그다음에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 수 있고, 그제야 우리가 따라서 먹었다. 그 정도로 엄격했다.


 매일 밥상을 차릴 때 나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는 내가 막내라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한 부분이다. 사실 심부름은 작은 오빠도 할 수 있었는데, 모든 심부름이란 심부름은 다 내 몫이었다. 아주 어렸던 5-6살 때부터 해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좀 억울하다.


 큰오빠는 자기 멋대로였다. 반면 작은 오빠는 항상 기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몸이 아픈 작은 오빠를 싫어했다. 엄마는 그런 작은 오빠를 보며 항상 속상해했다. 언니는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항상 말이 없고 할머니 도와주는 사람. 그리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는 사람. 나에게 언니는 그냥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른 나가서 돈 벌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쯤, 여자들도 공부해야 한다는 교육열이 막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참고서 한 권을 안 사주셨다. 큰오빠가 공부할 때는 엄마가 돈을 다발로 싸 들고 무조건적으로 지원을 해줬었는데. 같은 자식인데도 큰오빠는 공부를 시켜서 더 훌륭하게 만들어야 하고, 나는 내가 알아서 잘하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큰오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은 적은 없다. 그 당시에는 큰오빠가 잘되어야 나도 잘되는 줄만 알았다. 부모님은 계속해서 장손이 잘되어야 나머지가 다 잘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나 참고서 한 권도 없다고.


 제사 때마다 큰 오빠가 주도적으로 잔을 돌렸다. 그 사람이 정말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남자들이 절하는 동안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집 안에서 취급을 못 받는 작은 오빠마저도 남자이기 때문에 들어가서 절을 할 수 있었다. “여자는 왜 절 안 해?” 그렇게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귀신이 피를 싫어해서. 여자는 정혈을 하기 때문에 부정 타서 안 돼.” 그렇게 답했다. 방문 밖에서 여자가 남자의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남자도 부엌을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식사 시간에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할 여자가 필요했다. 목이 말라도 부엌을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물 가져와.” 그렇게 명령했다. 그걸 큰 오빠도 보고 똑같이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모든 여성이 남성은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였다.



동네 아저씨들이 허구한 날 아줌마들을 패고 그랬다.


 정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했다. 집에서 처음 발견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피가 좀 나오는 것 같아. 상처도 안 났는데 이상하다.”라고 그랬더니, 엄마가 “벌써 멘스가 터지려나 보네.”하고 허허 웃으면서 면 정혈대를 줬다. 옛날에는 일회용 정혈대가 비쌌기 때문에 면 정혈대를 썼다. 그걸 맨날 엄마가 빨았다. 집안에는 알리지 않았다. 엄마에게 말한 게 전부였다. 친구들끼리도 정혈에 대해서는 말을 안 했다. 그 시절에는 정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엄격한 금기처럼 다뤄졌다.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은 일상과 너무 떨어지는 이야기라서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정혈을 시작하고도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정혈하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대학 때 결혼을 시작한 애들이 이야기를 해줘서 그때 겨우 알았다. 그런 사회에서 성교육이란 뭘까.


 초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 애들 가슴을 만져서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았던 적이 있다. 잘린 게 아니라 발령을 받았다. 그걸 듣고 ‘지난번에 선생님이 나를 만진 게 그래서 그랬나?’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것도 성추행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 한 번은 초등학교 때 나보다 두세 살 많은 오빠가 내 가슴을 만졌다. 너무 놀라서 엄마한테 가서 울면서 일렀는데 그냥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그렇게 큰일이었는지 몰랐다.


 그게 기억이 난다. 동네 아저씨들이 허구한 날 아줌마들을 팼다. 열 집 중에 일곱 집은 일 년에 한 번씩 아줌마를 팼다. 내가 밖에서 놀고 있으면 아저씨가 아줌마를 끌고 나와서 애들 보는 앞에서 패고 그랬다. 한 번은 집에 들어와서 엄마한테 “저 아줌마 맞고 있어. 쓰러져 있어.”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그냥 “괜찮아.” 그러고 말았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 하고, 무섭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그날이 지나가면 그 집 안은 다시 잘 살았다. 아줌마가 맞았는데도 그다음 날 보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길래 ‘다들 저렇게 사는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보니 그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인식됐다. 그땐 그걸 폭력이라 부르지 않았다. 부부싸움이라 했다. 부부는 가까우니까 좀 화나면 그럴 수 있는 거구나. 저 아줌마가 도망을 안 가는 거 보면 괜찮구나. 참고 살만하구나.



“여고는 충고(남고)에 잘 보여서 시집가야 한다.”


 사춘기를 지나며,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 외모가 굉장히 스트레스가 됐다. 나는 발육이 남달라서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는데, TV에서나 학교에서나 작고 얄쌍한 애들만 인기가 있었다. 내가 집에서 아빠 사랑을 받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선생님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맘처럼 안되니까 불만이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겼을까.’ ‘나는 왜 덩치가 크지?’ ‘엄마가 왜 밥만 많이 먹였을까.’ ‘내가 성격이 밝고 마음이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건 아무 상관이 없구나. 외모로 판단되는 게 더 많구나.’ 그렇게.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 우울하고 재미가 없었다. 누군가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얘기해줬으면 좀 달랐을 텐데.


 모든 어른들이 “여고는 충고(남자고등학교)에 잘 보여서 시집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예쁜 여자애들을 은근히 싫어하기 시작했다. 다 충고에 잘 보이려고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애들이 여자의 위신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했다.



꿈은 없었다.


 꿈은 없었다.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학교에서 써내라고 하면 현모양처라고 썼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그냥 멋있어 보여서 썼다.


 대학은 남들 다 가니까 가고 싶었다. 내가 여기서 안가면 뒤처지는 것 같아서 그랬다. 그리고 대학을 안 가면 돈을 벌어야 하는 데 돈 벌기가 싫었다. 선생님이 추천해 준 대학은 전부 4년제였다. 하지만 집에서는 큰오빠가 전문대를 갔기 때문에 내가 4년제 대학을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전문대를 갔다.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때에는 보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점차 커가면서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님은 내가 성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내 미래는 시집을 가거나, 아버지 따라서 공무원 되는 것. 이렇게 아예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고, 예술을 하는 사람이나 연예인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나와 아주 먼 사람이라 생각했다.


 꿈이 없었던 건 조금 후회된다.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고 뭘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엄청나게 빨리 배우고 습득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칭찬을 받기는 커녕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때 어떤 목표를 잡았으면 지금 그 분야에서 이름을 떨칠 정도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마찬가지로 꿈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해주는 어른들이 곁에 없었다.



어느새 따라잡을 수 없고,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처음에는 단지 정혈을 한다는 걸로 여남이 구분될 뿐이지만 조금 더 크면 미래가 달린 문제가 된다.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할 때 참고서를 사주지 않는 것처럼. 어른이 된 뒤에 남성은 취직을 하지만 여성은 시집을 간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성별을 이유로 경제 활동 기회가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이제야 너무나 큰 차이처럼 느껴진다. 뒤돌아보니 그렇다. 처음엔 모른다. 사회에 나서면, 어느새 따라잡을 수 없고,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그들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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