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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Oct 22. 2021

똑똑똑, ‘셋의 시간’까지 144일 남았습니다

'너'라는 세상이 '우리'를 열고 들어왔다 (3)

결혼 전 나는 결혼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만, 결혼하자마자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빨리 할 걸!" 하고 한탄했다. 하기사 그때는 결혼해서 '같이 산다'는 것이 고난이도로 여겨지는 미지의 세계였으므로, 얼마나 좋을 줄 알 도리가 없었고 그저 그때 내가 구축해놓은 '내 세상'이 너무 좋기만 했다.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름 내 힘으로 나를 먹여 살리고(물론 집은 부모님이 도와주셨지만), 입히고, 재우고, 돌보며 살아왔다. 그것은 꽤 고단한 일이었지만, 대단한 자유를 누리는 일이기도 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땐 얼마든지 혼자 있을 수 있고, 함께 하고 싶을 때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을 수 있는 삶. 내가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해도 되는 딱 그 정도의 평화와 안정이 좋았다.


결혼을 하니까 그 모든 즐거움이 증폭됐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같이 하니까 좋았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같이 가니까 좋았다. 같이 먹고 같이 보고. 무엇보다 데이트가 늦게 끝나도 같이 집에 갈 수 있었다. (이게 제일 편하고 좋았다.)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영화를 보고, 가만히 누워 있고 싶으면 누워 있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다. 난 정말 그런 순간순간이 좋았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고 있는 시간도 좋았지만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는 그 무지막지하고 신나는 '가능성'이 완전히 우리 것이라는 게 너무 좋았다.


그밖에도 편한 점들은 너무 많았다. 나는 뭘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하지만 설거지를 싫어하고 잘 못하는데, 신랑은 요리를 잘 못하고 치우는 걸 잘했기 때문에 나는 좋아하는 요리만 하면 됐다! 혼자 살 때는 집안일이 (당연히) 다 내 몫이 었지만, 결혼하니 내가 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설거지도, 빨래도,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일도, 정말 싫은 화장실 청소도 부지런한 내 반려인이 모두 도맡아 해주었다. 머리카락이 바닥에 있는 걸 보면 스트레스 받는 나는 그때그때 청소기만 밀어주면 됐다. (쓰다보니 집안일 하는 사람이 생겨서 좋다는 것처럼 흘러가는데, 절대로 그것만이 좋아서는 아니다! 네버!)


퇴근하고 집에 가면 귀엽고 다정한 신랑과 같이 맛있는 걸 먹는 게 너무 큰 즐거움이 됐고,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를 해도 어두운 밤길 마중나와주는 든든함에 마음이 푸근했다. 어쩌다 밖에서 이런 저런 근심이 생겨도, 집에 가서 신랑과 이야기를 하고 웃고 울고 하면 모든 게 툭툭 털어졌다. 그야말로 우리 둘만의 시간과 공간에 행복이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아깝다고 느끼면서 시간은 후루룩후루룩 흘러, 정말 '눈깜짝할' 사이 2년이 지났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라니, 100년을 살아도 짧을 것 같았다.


결혼 전의 나처럼, 나는 또 이 시간을 조금만 더 연장하고 싶었다. 밥 먹고 치우고 같이 손 잡고 쇼파에 앉아 넷플릭스만 봐도 좋은 이 시간을. 볕 좋은 일요일 오전 같이 쓸고 닦고 집안을 치우고 개운한 마음으로 침대를 뒹굴뒹굴 거릴 수 있는 이 시간을.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고 우리만의 노래를 부르며 기분 좋게 밤산책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조금만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이 좋으면 셋이서는 더 좋을 거야."


아기 갖는 것을 망설여하던 나에게 아이 둘 키우는 친구가 말했다. 셋의 시간이 행복할 거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지만, 그 큰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둘만의 시간'과 맞교환해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신랑을 보고 있자면 '요 얼굴 닮은 아기 어떨지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임테기를 하고, 곧바로 산부인과에 다녀와 '아기집' 사진을 받은 날. 우리는 남은 9개월가량을, 우리 '둘만'의 시간을 더 우리 마음대로, 더 재미있게 보내자는 결심(?) 같은 것으로 병원에서 나와 바로 닌텐도를 사러 갔다. 몇달 전부터 살까 말까 고민하던 것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은 채로 눈만 마주치면 웃음이 터졌던 날이었다. 그때 기분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다.

'좋다', '나쁘다'의 감정이 아니었다. '기쁘다' '안 기쁘다'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다행'인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냥 단순히 우리에게 같이 겪어갈 새로운 이벤트가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정도로만 현실을 인지하다가 어느 순간 또 '푸핫'하고 웃었다. 언젠가는 '그냥 우리 둘이 살아도 좋은데.' 같은 말들도 하던 우리였기에, 현실 자각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대뜸 "정말? 이거 리얼이지? 오마이갓." 하기도 했다.

며칠 후 시댁에도 소식을 알리는데, 호주에 있는 형님이 신랑에게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아기가 너네를 찾아온 거네."


우리 둘다 '아!' 했다. 너무 어울리는 말이었다. 형님의 한마디는 수많은 감정의 경계 사이를 방황하던 우리 둘의 마음을 비로소 안정권으로 밀어넣어 주었다. 우리가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물론 '딩크'를 선택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엄마아빠가 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마침 우리에게, 우리 둘의 세포와 유전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생명이 생겼다는 필연을,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스으윽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 둘이서라면 뭘 해도 재밌고 행복했으니, 이 또한 즐겁고 애틋한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아니 우리가 구축해놓은 이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상에서 나와 또 다시 '미지의 세계 2탄'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 1탄'이 그랬듯, '미지의 세계 2탄' 역시 알고보니 100년이고 200년이고 있어도 좋을 '우리의 세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안 그래도 아껴먹고 싶었던 '둘의 시간'에 '예정 마침표'를 받아놓고 있자니, 이 시간이 더 심하게 달달하고 맛있다. 역시, 인생에는 중간 중간 리밋(limit)이 있어줘야 '지금'이 소중한 줄 알고 살아진다니까.


오늘도 둘이서 행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찍어본다. 144일 뒤면 찾아올 '셋의 시간'을 격하게 환영할 수 있도록!  


 



방실방실 아조씨 | 포차성애자. 소녀 감성과 아저씨 취향 그 사이 어디쯤에서 소맥을 말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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