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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03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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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Jan 31. 2022

이번 생에 다정한 큰 딸은 못 할 것 같습니다

편지 일기 03.


하루가 참 길었어. 명절 연휴 중 하루를 보내고 나면 왠지 대단한 걸 해낸 기분이야.


그 성취감 앞엔 명절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도 하고 말이야. J,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이혼을 하고, 우리 엄마는 내가 스무 살에 재가를 했고 아빠는 아직 혼자야.


엄마가 재가를 한 후 동생과 어두컴컴하고 휑한 집에 남겨진 후 몇 년 간은 엄마도, 아빠와도 교류를 하지 않았어. 지금 이렇게 엄마와 아빠 각각 집에 가게 된 것도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구.


지금 동생이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으니 엄마네, 아빠네 가는 것이 크게 부담은 없을 거야. 처가를 핑계 삼아 엄마와 아빠네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에 반해 나는 큰 딸이라 모른 척 외면 하는 게 쉽지 않아.


그래서 이번 명절도 엄마 집에 따로, 아빠 집에 따로 다녀오게 되었어. 가기 전부터 나는 제법 비장해. 엄마네 갈 때 아빠에게 줄 선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백팩에 그 선물을 집어넣고 거의 거북이 등껍질처럼 큰 짐을 등에 이고 엄마네를 먼저 가.


엄마와 재혼한 새아버지에게 나는 꽤 상냥하고 밝은 편이야. 몇 년 간은 아저씨라고 부르던 호칭도 아버지라고 바꿔 부르고 용돈도 따로 챙겨 드리고. 사실 아빠에게 ‘가족끼리 그람 안 돼’ 라는 것처럼 아빠에게 막상 하지 못하는 걸 새아버지에게는 거리감없이 잘하는 편이야. 그래야만 엄마가 행복할 것 같아서.


무뚝뚝하고 표현에 서툰 내 동생과는 다르게 살갑고 상냥하고 밝은 딸이어야만 나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큰소리치고 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어. 철저한 인풋과 아웃풋을 계산한 행동이기도 해. 학습된 행동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다.


새아버지는 항상 자고 가라, 아니면 저녁 먹고 가라 하지만 내 다음 행선지는 멀지 않은 아빠 집으로 가야만 하기 때문에 대충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 이건 비단 내게만 적용되는 행동이 아니라 내 동생에게도 마찬가지야. 동생과 둘 다 아빠 집으로 움직여야 할 땐 미리, 혹은 적당히 입을 맞추고 빠져나올 때가 많았어. 이쯤 되면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생각하겠지? 그냥 안 가면 될 거.


아빠 집으로 가면 또 어떻게. 아빠는 우리가 재가한 엄마와 교류하는 것을 매우 불편해해. 아니, 싫어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애써 또 엄마네 다녀왔다는 말을 숨기거나 엄마에게 음식이라도 받아온 걸 눈치채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를 시전 하며 모른다, 글쎄요, 그러게요. 를 반복하곤 해.

동생은 이미 그런 반복적인 수습 행동에 신물이 난 상태라 아이와 코로나 핑계를 대며 슬쩍 빠진 지 꽤 되었어. 이 또한 큰 딸의 몫이 된 거야.


아빠는 다혈질이라 나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주 화를 내. 다정한 큰 딸 바이브 같은 건 없구, 유독 엄마와 아빠 앞에서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있어. 당신들은 그런 내 모습이 싸가지 없다, 딸이라고 하나 있는 거 웬수다 라고는 하지만 이건 그나마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야.


이번 명절에도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화도 내고 눈물도 보이며 내게 서운한 이야기를 막 털어놓았어. 그와 동시에 한 때 단란했던 가정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털어 놓았고. 아빠의 단골 술안주라 이제는 그 이야기에 억울하지도, 서운하지도 않고 그냥 덤덤하더라.

예전 같았으면 나는 왜 이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난 걸까. 내 인생만 왜 이렇게 불행하고 슬픈 걸까라고 자책하고 책망의 대상을 애써 찾았겠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에서 가족들 사이 모든 중재를 해온 지친 은희에게 찬혁이가 이런 말을 해.


“가운데 끼어서 니가 고생이 많다. (…) 너 혼자 집안 일 다 해결할래? 가족이라도 네가 해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 네가 뭐라고? 가족이 너 하나 때문에 달라지겠니?”



행복하고 단란한, 오순도순 재미있는 친구들 가족들을 보면 많이 부럽기도 하지만 내 행복은 가족으로부터 오는 것 같진 않아.


그냥, 적당하면서도 피곤한(?) 이 거리를 유지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행복했으면 하는 게 요즘의 내 바람이야.


엄마에게 언니 같은 딸, 아빠에게 누나 같은 딸, 동생에게 엄마 같은 누나 노릇은 이제 그만하고 한때 행복했던 우리 가족들 모두 각자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물론 나는 나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궁리를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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