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전공인 현대소설 수업 과제였던 것 같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감상하고 12살에서 24살까지의 빌리의 단 하루, 그 일상을 골라 소설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 과제는 내게 참 많은 것들을 남겼다.
타인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심리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상상하는 재미와 나만의 그 우주가 크게 열렸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 덕에 (좋아하는) 타인의 삶에 쉽게 물들게 되었고, 몰입하고, 그 감정을 더 헤아리게 되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영화에는 없던 빌리의 스물네 살 하루 중 하나다. 오로지 상상으로만 그린.
크리스마스인데 안개가 잔뜩 끼어있었다. 아파트 창 너머로 보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트라팔가 광장의 트리는 아름답기보다 숨을 가쁘게 했다. 앞으로 3일이 남았다.
백조의 옷을 입고 무대에 나설 시간. 헌데 지금 몇 시쯤 되었지? 넋을 놓고 창밖을 쳐다보다 시간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조급해진 마음이 아니라 간만에 주어진 이 휴식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였다.
룸메이트인 매튜는 엘리와 호스 가즈 Horse Guards로 가서 근위기병대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보러 간다며 일찍이 기숙사를 나섰다.
그 녀석이 집을 나설 때 내게 건네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메리 크리스마스! 허리 조심해.”
진심일지 너스레를 떠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의 그 한마디에 척추를 꼿꼿이 세우며 바싹 긴장을 하고 말았다.
침대 위에 앉아 종아리에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탄탄하게 당겨오는 근육의 느낌이 이젠 싫지 않다.
그렇게 두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품에 안고 상체를 일으켰다 눕혔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하복부가 조여 오는 느낌이다.
스물다섯 번째에 도달했을 때 상체에 힘을 빼고 힘없이 털썩 누워버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칭에 열중하고 무언가 잡념에 빠졌을 때 항상 시간은 물처럼 흐르곤 한다.
하지만 겨우 8분이 지난 오후 3시,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호스 가즈로 간 매튜가 근위대의 퍼레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몸을 털고 침대 위에서 일어나 협탁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무작정 다이얼을 눌렀다.
크리스마스, 지금쯤 토니와 아빠는 광부 아저씨들과 열심히 위스키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신호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빌리?”
분명 토니의 목소리다. 이 시간에 왜 집에 있는 거지? 크리스마스 파티는? 2년 전부터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한 아빠는 적어도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나?
수화기 너머로 가족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반갑다는 감정은 정적의 뒤로 숨겨둔 채 토니와 나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인데 왜 집에 있어?”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러자 토니는 피식 웃는가 싶더니 내게 되물었다.
“넌 크리스마스인데 왜 거기 있냐?”
“크리스마스니까.”
“그 망할 발레단은 크리스마스 휴일도 안 주는 거냐?”
언제나 망할, 망할. 토니는 나이를 그렇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그놈의 ‘망할’이라는 말은 그만 좀 할 수 없어? 그러니 카렌이 형을 싫어하는 거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넌 이 시간에 왜 연습도 않고 기숙사에 처박혀 있느냔 말이지. 아빠나 내가 보고 싶어 전화한 거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우린 3일 뒤에도 만날 거잖아. 그 망할 연습이나 해.”
토니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직 아빠의 안부도, 그곳에 잠든 엄마와 할머니에 대한 안부도 묻지 못했다.
토니가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이유 하나뿐이다.
혹여 근심이 감정 위에 쌓이면 분명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졸업 발표회 이후의 파장이 아빠와 토니에게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잡념은 버려두기로 했다. 물론 토니를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화기 앞에서 쿨하게 미련을 버려두고 겉옷을 입고 목도리를 둘러매고 집을 나섰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런던은 그 어디 하나 빛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거리에 얇게 쌓인 눈을 밟고 있노라니 마치 스펀지 위에 올라선 것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 형의 레코드였던 T-Rex의 Cosminc Dancer를 들으며 침대 위를 방방 뛰었을 때,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폭신한 눈을 밟으며 화이트 홀을 지나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인파에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대형 트리 앞을 꽉꽉 메운 것은 역시나 가족들과 연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드문드문 아시아에서 온 관광객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역시, 무리해서 광장까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작년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유난스럽진 않았는데.
밟고 있는 눈마저 짜증스러워질 것 같은 기분에 대형 트리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별을 몇 초 정도 바라본 다음 어렵게 몸을 돌렸다. 헌데 갑자기 대형 트리 쪽에서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돌아섰던 몸의 방향을 돌려 트리 쪽으로 향했다.
서로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의 사이도 거침없이 뚫고는 음악이 들리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지는 끌림이었다. 음악은 사람들의 소음으로부터 보호막을 치며 자신을 보호했고, 나는 그것에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그 보호막이 한 꺼풀씩 벗겨짐을 느꼈다.
I Love to boogie. 광장의 가장 중심, 대형 트리 앞에서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크리스마스 이벤트 중 하나겠지, 하며 개의치 않게 돌아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헌데 정말 무언가에 끌려가듯 수많은 인파를 뚫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이 사람들 가까이로 걸어와 버렸다.
그들은 T-Rex의 음악을 틀어놓고는 춤을 추고 있었다. 탭댄스, 그리고 광대가 가져야 하는 요소를 모두 삼켜버린 것처럼 그들은 보는 이들은 물론 자신들도 그 즐거움에 매료되어 있었다.
발이 제일 먼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12년 전 윌킨슨 선생님과 함께 추던 가장 즐거웠던 춤. 음악은 계속 이어졌고 사람들은 즐거움을 박수로 표현했다.
그때 퍼포먼스 팀 중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함께 추자며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이것이 기회인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기도 전에 나는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 춤을, 나는 막힘없이 사람들 앞에서 추고 있었다. 팔을 뻗고, 리듬을 타며 스텝을 움직이고 이리저리 점프를 하자 사람들의 호응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크기만 한 그 극장에서 날아오르는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로열 발레학교에 입학 오디션을 보던 그 순간이 생각났다. 그리고 모리슨 선생님의 그 질문도 떠올랐다.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지?”
나는 여전히 내가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새가 된 것처럼, 희뿌연 안개가 된 것처럼.
겉옷을 벗지도 않고 소파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살짝 감았다.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불빛, 거리에 수놓은 크리스마스 조명이 너무도 눈부셔 집안이 환할 정도였다. 다시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너무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발레단 동기들과 런던 골목의 가장 비싼 클럽에서 술잔을 기울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더 멋진 하루를 선물 받았다.
내일이면 다시 연습실에 모여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다양한 해프닝들을 늘어놓겠지만 나는 조금 참아볼까 한다.
그때 현관 조명이 켜지고 매튜가 환호성을 지르며 들어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빌리!”
매튜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넌 오늘 어땠어?”
트라팔가 광장에서 I Love to boogie 음악에 맞춰서 퍼포먼스 팀과 함께 춤을 췄어,라고 말하기엔 오늘의 내 추억을 몽땅 쏟아붓는 것 같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 최고의 크리스마스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