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를 고발(!)합니다.
나는 이른바 실리콘밸리로 알려진 베이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캘리포니아 산호세(표준 표기법으로는 새너제이)에 산다. 구글본사가 있는 마운틴뷰,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 넷플릭스 본사가 있는 로스가토스, 이제는 메타가 된 페이스북이 있는 멘로 파크 등에 가는 데 차로 15분~20분이면 갈 수 있다.
이제는 좀 무뎌졌지만, 이사 오고 나서 얼마 안 지나 조금 멀리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이베이 본사가 보이고 가까운 코스트코를 다녀오다가 엔비디아 빌딩을 본다든지 지인네 집에 놀러 가는 길에 애플 본사가 있다는 사실에 혼자 막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최첨단 테크 기업들과 스타트업들이 모인 삐까뻔쩍한 곳이자, 미국에서도 집값이 비싸기로 매우 유명한 곳인데, 정전이 밥 먹듯 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내 페이스북에 썼던 글 일부를 잠시 옮겨 본다.
저녁 7시 20분쯤이었나.
저녁을 먹고 잠시 앉아 도란도란 대화하는데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다.
안 그래도 집 앞 주차장 앞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어서
거기에 차를 대도 되나 조금 불안했더랬다.
오늘 오가며 고속도로에도 쓰러진 나뭇가지, 사고 난 차량도 몇 대 봤다.
지난주는 이 지역 일대가 정전이 돼서 시아가 하루 학교에 못 갔다.
화요일 오후에만 해도 하교 직전에 전기가 나갔지만
수요일은 예정대로 학교가 열 거라는 공지가 왔었는데
당일 아침 6시에 정전 때문에 학교를 닫는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때 우리 집은 다행히 인터넷만 안 됐는데 이 지역 일대에 전기가 나간 집이 대부분이었다.
10분 거리에 사는 지인은 이미 정전된 지 이틀이 됐다며
한국에서 사 온 비싸고 귀한 생선이 냉동실에 많은데
하루이틀 더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대신 좀 보관을 부탁한다고 했고,
3일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부탄가스버너로 오트밀만 끓여 먹던 다른 지인은
(이 지인이 사는 곳이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
정전 피해가 없는 친구네서 발전기를 가지고 와 버텼다고도 했다.
신호등이 나간 도로가 많아서 모든 차가 온 순서대로 한 대씩 눈치껏 가는 진풍경도 있었고
YMCA도 정전돼서 닫았고, 근처 도서관도 전기 찾아 모여든 사람들 때문이었는지 나중에는 그쪽도 정전이 됐는지 일찍 닫았다.
학교는 다행히 하루만 쉬고 전기가 복구되어 나갔지만,
전기가 다 복구되는 게 총 4~5일 정도 걸렸나?
1월에는 우리 집도 새벽부터 15시간 정도인가 정전된 적이 있다.
전기로 열리는 차고문을 열지 못해서 차 한 대는 꺼내지 못해 남편이 출근을 못했다.
시아 학교에 데려다주고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고 했는데
근처 카페는 문을 닫은 데가 많아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곳에 가서 일하다
점심께 나도 같이 데리고 나가 다시 함께 카페로 피난 갔다가
시아 픽업하고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전기가 복구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때야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마침 카톡에서 얘기하고 있던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또 정전됐다고 하니 너무 자주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너... 실리콘밸리 산다며.
그러게나 말이예요.
그래도 경험치라는 게 참 대단하다.
뭐라도 경험한 적이 있으면 그래도 비교적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1월의 경험치 때문일까. 이번에도 바로 한 곳에 모아 뒀던 캠핑 랜턴들을 일부 켰다.
남편은 온수가 끊기기 전에 후다닥 시아를 씻기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차고 열쇠가 필요할 것 같다고 바로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서
내일 만나서 차고 열쇠일지도 모르는 열쇠들을 받을 약속을 정했다.
지난번 이 일대 정전일 때 가득 충전해 두었던 외장 배터리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예정된 줌 미팅에 못 갈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내일 밥은 어떻게 하지? 아, 하필이면 어제오늘 코스트코+한국 장을 봤는데...
일단은 최대한 냉장고를 열지 말고 밖에 놔뒀던, 구워 놓았던 빵이랑 밖에 있는 과일 등으로 대충 때워야겠구나.
(우리 집은 전기스토브인 데다 가스버너가 있긴 하지만 부엌이 있는 1층은 너무 어두워서 전기가 안 들어오면 요리가 불가하다. )
아.. 설마 학교도 정전된 건 아니겠지?
전기회사(PG&E) 홈페이지를 확인하고 학교는 괜찮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 오늘도 이력서 업데이트는 하지 말라는 계시인가.
그래. 이참에 지난 번 브런치 글처럼 청순하게 쉬어야겠다.
...라고 결심하는데...
허무하게도 9시쯤 전기가 돌아왔다.
그래서 이력서 업데이트는 했냐고?
그럴 리가.
괜찮다.
시간을 잃은 대신 글을 얻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