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반지를 팔겠습니다.
얼마 전, 어머님( 김해인 씨의 엄마)의 칠순 기념 식사를 조촐하게 했다.
어머님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직접 식당을 알아보고 예약을 하셨고, 직접 식사비를 결제하셨다.
칠순 하면 자식이 당연히 식사를 대접하고 여행을 보내드리는 것이 마땅하나 오히려 어머니는 우리에게 용돈까지 챙겨주셨다.
칠십이 되어도 자식은 세상에 내놓는 것이 아까울 만큼 여전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고 , 생각해 보면 오늘날까지 큰 사고 없이 잘 살아준 모두가 너무 감사해서 칠십 살을 기념하여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결혼 이십 년 차 큰 며느리인 나에게 해인이와 사느라 애를 참 많이 쓴다,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순간 울컥, 마음에 파도가 치는 것처럼 울렁거리며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우는 건 어쩐지 너무나 후져 보여서 그냥 한 번씩 웃었다.
지금은 당연한 표준 계약서 이전의 시대에는 모든 계약이 주먹구구식이었다.
휴식도, 취침시간도 보장되지 않았고 촬영 당일 감독이 찍으려고 들고 나온 대본을 다 찍어야 그날의 촬영이 마무리되는 그런 식이었다.
두세 시간 자고 다음 날 다시 촬영을 나가는 일이 당연했고 링거투혼이 훈장처럼 느껴졌다.
어떤 약을 섞어 맞으면 피로회복에 빠르더라.. 자랑릴레이를 했다.
나 어제 링거 맞은 사람이야, 바쁜 사람이라는 이야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랑에 어깨가 으쓱거리던 시절, 스태프들의 월급 또한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았다.
촬영부의 막내가 10을 받으면 그 위는 40을 받았고 퍼스트는 70을 받고.. 이런 식이었으니 막내는 10을 먹고 이슬만 먹고사는 기분으로 몇 달씩을 버텼다.
그리고 영화라는 건, 월급이 아니라 작품 한편당의 페이로 계약을 하는데 보통 촬영 직전에 계약금, 영화 중간쯤 중도금, 그리고 촬영 마무리와 함께 잔금이 나온다.
지금은 돈을 다 못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잔금을 제 때 주지 않고 애를 태우거나 가끔은 떼먹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자세히..)
잘 나가는 조명부로 영화를 시작한 김해인 씨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동안 조명부 일을 계속했다.
촬영을 전공했고 촬영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조명부로 쌓은 커리어는 전혀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 촬영부로 옮기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막내로 장비 들고 다니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자신보다 어린 상사밑에서 일을 해야 하며, 무엇보다 40을 받던 페이를 다시 10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첫 아이를 키우느라 한차 정신없던 때 촬영부로 옮기기로 대 결심을 했다.
서른도 넘은 나이었다.
초보엄마였던 나는 유난히 예민하고 잠을 못하는 첫 아이를 키우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무런 벌이가 없었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나는 나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그때의 나처럼 오롯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을 선택할까..
기회가 된다면 번외 편으로 나의 이야기를 쭈욱 써보고 싶다.
벌이가 없이 전업주부, 전업맘으로 살고 있던 나는 어느 상황에나 큰 불만이 없는 성격이어서 갑자기 줄어든 김해인 씨의 벌이에 조금 당황했지만, 내게는 모아둔 돈도 있었고 우리에겐 다행히 대출이 전혀 없었다.
대출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빛이라는 걸, 그 시절엔 몰랐지.. 그게 당연한 줄 알던 나이였으니 말이다.
촬영부 막내의 작품이 하나하나, 늘어날수록 통장의 잔고는 야금야금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이 왔을 때, 통장의 잔고가 0을 찍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으나 나는 김해인 씨에게 단 한 번도 쭈굴거리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건 나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나의 결심이었고, 나의 자존심이었다.
당장 나가서 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의 나는 나의 결혼반지를 팔기로 큰 결심을 했다.
내게는 반짝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하나 있었다.
이런저런 양심의 이유로 일생 다이아몬드를 내 몸에 두르고 사는 일은 하지 않겠다! 이야기하고 다녔던 나이지만 김해인 씨의 외 할머니, 나의 시할머니께서는 나에게 꼭 반지를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어릴 적 김해인 씨를 잠시 키워주시기도 하셨고 이래저래 각별한 손주 그래서 각별하고 귀여운 손주 며느리에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것은 다이아반지였던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이기에 나는 못 이기는 첫 반짝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백화점에서 샀지만 그 반지는 늘 마음의 짐이었다.
내 신념을 가져다 버린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내 기준으로 너무 비싼 물건이어서 함부로 끼지도 못하고 할머니집 금고에 꽁꽁 보관을 해두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무도 몰래 그 반지를 팔기로 결심을 했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도록 세 번도 끼지 않아서 아무도 모를 테니 나 혼자만 알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반지를 팔기로 결심한 날은 무척 추웠다.
이런 고가의 물건은 어디서 어떻게 거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무작정 종로로 갔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심장이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팔기로 결심한 반지를, 팔지 않으면 당장 무슨 뾰족한 수도 없는 그런 반지를 손에 쥐고는 이래도 되나, 이게 맞나, 혼자 길에 멈춰 서서 오백번 고민을 했다.
정해진 답에 뭐 그렇게 고민을 했나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나온다.
비싸고 반짝이는 커다란 반지는 처음 산 가격의 절반도 받지 못하고 내 손을 떠났다.
이거 백화점의 비싼 매장에서 산 거예요.. 꼬물딱 거리며 이야기했지만 다이아를 팔 때는 그런 건 하나도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순금반지로 사달라고 할 걸, 오래오래 생각을 했다.
최고급 큐빅을 그 자리에 박아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안 했다.
집으로 돌아와 특별한 일이 없던 하루처럼 똑같이 아이를 재우고 밥을 해 먹었다.
“우리 이번 작품 끝나면 여행 가자.
내가 남쪽으로 튀어,라는 소설을 읽고 있거든.
그 소설에 이리오모테라는 곳이 나와.
주인공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장소야. 거기에 가자.
근데 이리오모테가 어디지? 어떻게 가지?”
반지를 팔았는데, 결혼반지를 팔았는데 그 돈을 생활비로 사용했답니다, 보다는 그 돈으로 소설을 보면서 너무 가고 싶었던 소설 속 배경이 된 그 섬으로 우리는 여행을 떠났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야 떠나간 내 반지도 보람을 느낄 것 같았고 훗 날, 부모님이 알게 되어도 덜 속상해하실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반지를 팔았다는 이야기는 말로도, 글로도 오늘 처음 해본다.
그렇게 그 해 겨울 우리 가족은 처음 들어보는 남쪽의 섬으로 튀었다.
소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