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호주의 작은 섬에 서식하는 포유류 브렘블케이 멜로미스는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바닷물이 범람하여 2016년 멸종을 했다.
멜로미스는 기후 위기로 멸종된 첫 포유류로 정식 기록되었고 2050년까지 지구의 모든 종의 1/4이 멸종될 것으로 예측된다.
멜로미스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을 때 등골이 오싹해졌다.
‘일상생활에서 ‘고작’으로 느껴지는 작은 수치가 지구에 가져온 파멸은 어마어마하네, 인간도 공룡처럼 언젠가 사라지겠지…
나는 이미 거의 반백 년을 살아서 별 걱정이 없지만, 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어떡하지.’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 위에 먹구름처럼 바글바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과 인류를 향한 고민보다 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위기들이야 말로 직접 온몸으로 맞서야 하는 리얼 공포이다.
나는 그 공포를 지난 몇 년간 제대로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길고 지난했던 코로나가 끝이 나고 주희는 입학식도 못했던 중학교를 3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등교할 수 있었다.
주희는 나의 첫 번째 아이.
주희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주희는 평범한 듯 매 순간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쭈욱..
섬세하고 예민한데 약간의 ADHD 증상을 가지고 있으나 병원의 도움까지는 필요 없었고, 예술대학을 나온 나와 해인이의 예술적 기질을 모두 안고 태어난 아이.
내향적이지만 돋보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
그런 성격의 아이가 2년 만에 등교를 시작했고 그와 함께 눌러두고 미뤄둔 사춘기가 대 폭발을 했다.
우주가 터져도 이보다는 약할 것 같은 엄청난 폭발력에 나는 매일매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주희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참 친했는데 선생님이 자신에게 부당한 이야기를 했다고 수업 중에 가방과 핸드폰도 둔 채로 학교를 뛰쳐나간 것이 사춘기의 시작 신호탄이었다.
그날 사라진 아이를 찾아 미친 듯 온 동네를 뛰어다니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다.
아이는 몇 시간 만에 다니던 복싱장에서 찾았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자기 장비도 없이 복싱장에 온 주희를 관장님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체육관에 있던 글러브를 내어주어서 주희는 속이 풀릴 때까지 샌드백을 치고 또 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손목을 다쳐 한참을 병원에 다녔다.
그 사건은, 담임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주희도 시험시간에 학교를 뛰쳐나가 시험을 못 보았으니 벌점을 받으며 그렇게 그렇게 마무리되었으나 매일이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주희의 담임선생님과 자주 통화하고 문자도 주고받고, 상담도 하면서 담이선생님과 절친이 되겠네, 생각이 들 만큼 친해졌다
그리고 어떤 날은 학교 담을 넘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의 모든 담을 넘어버리는 아이로 키우겠어.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상황을 쉽게 넘길 수 있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의 주희를 보면 아이가 그런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귀엽고 평온한, 그림을 잘 그리는 여고생일 뿐.
그 시절의 자신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감정 투성이었다고, 지금의 주희는 말한다.
아이의 사춘기로 죽을 맛인데 더 큰 일은 김해인 씨에게서 터졌다.
스무 살,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25년 차 베테랑 촬영 감독인 김해인 씨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칼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정말 돌덩이 같은 사람이다.
돌덩이 같은 사람이기에 그러한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와 드라마 현장을 20년 넘게 지켜왔겠지, 생각을 하면 직업인으로서 깨끗한 존경과 같은 , 그런 마음이 든다.
그런 김해인 씨와는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친한 조명감독 형이 있는데, 주희의 사춘기가 터져 나온 그 해, 5월 4일. 스스로 생을 마감을 했다.
그 전화를 받던 순간, 늘 단단한 돌덩이 같던 이 사람이 내 앞에서 순식간에 그냥 무너져 내렸다.
마치 진공 상태 같던 그 순간의 공기, 그 표정, 몸짓.
한 사람이 쌓아온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그 공포.
김해인 씨는 조명감독 형과 이번 작품을 설득해서 함께 했다면 아마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촬영을 중단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김해인 씨를 난 한 순간도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집에 꼼짝 않고 앉아있는 김해인 씨와 매일 산책을 하고, 함께 영화를 보고, 시시한 농담을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난 밥을 하고 또 했다.
우울한 감정을 맛있는 음식들이 밀어내어 줄 거야, 믿으며 말이다.
가끔은 우울은 폭력적인 태도로 나타나기도 했고, 엉엉 울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밤이 되면 이 사람이 죽지 않고 잘 자고 있나, 숨소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이 우리 집은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기 직전처럼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빅뱅보다 더 엄청난 폭발 중인 사춘기 주희와, 자신의 세상을 잃어버린 우울증 김해인이 한 집에 있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이 모든 상황에서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는 고작 7살짜리 꼬맹이 막내 주원이가 있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내가 걱정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밥 상에서 제대로 붙어버린 것이다.
주희는 내가 손써볼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맨 발로 집을 뛰어나갔다.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신발을 들고 바로 따라 나갔지만 얼마나 빠르게 사라졌는지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경찰을 불러 근처 CCTV를 뒤져서 주희가 뛰어간 곳을 계속 추적했다.
Cctv속 주희는 맨발로 지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뛰고 또 뛰었다.
경찰과 내가 동시에 온 동네를 뒤졌는데 다행히 내가 경찰보다 먼저 아이를 찾았다.
분명 맨발로 뛰어나간 주희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뛰다 지쳐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언니가 편의점에서 슬리퍼를 하나 사 주고 말없이 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밤, 어디론가 사라진! 주희와 해인이를 찾느라 꼬맹이 주원이 손을 잡고 나는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매일매일 파국으로 향하는 것 같은 우리 집이 깨지지 않게 나는 열심히 붙잡으며, 꼬맹이 주원이가 상처 없이 이 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내 모든 정성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어느 밤에는 이제 그만 살고 싶다고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김해인을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세상에 사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주희에게 의미를 찾지 말고 우리 그냥 살자 이야기하며 함께 놀이터에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내가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사실 다 엄마에게 받은 넘치는 사랑들 덕분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그 사랑의 힘이 신기하게 위기의 순간마다 튀어나와 내게 힘을 주었다.
엄마도 나를 그냥 사랑했기에 나도 그냥 그 둘을 그냥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냈더니 신기하게 모든 순간은 다 지나갔다.
우울증 김해인 씨는 이제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사춘기는 시간이 지나자 정말 신기하게 싹 사라져 버리고 그림을 잘 그려 경찰서 벽화도 그리고 옷도 만들어 입는 고등학생으로 자랐다.
그리고 주원이는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닌 농구를 잘하는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열 살이 되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다 잘 넘긴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하고 모두가 평온한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다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객관적으로 멀리서 회상하는 그 시절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4인 가족이 겪은 sf 판타지 장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춘기 주희는 팡팡 터지는 우주 대폭발 빅뱅
우울증 슬럼프 김해인은 좋은 모든 감정은 다 빨아들이고 어둠만 내뿜는 블랙홀
그 주위를 계속 도는 나와 주원이는 소우주
그런 상상을 하기 시작하자 죽을 것 같았던 그 시절도 다 괜찮았네,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이 하나 더 남았다.
우리 집엔 지금 10살, 또 다른 사춘기 새싹 십 대 김주원이 자라고 있다는 것과
나는 갱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자 이번에는 김해인 씨,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