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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문화사 ⑨] 화신백화점과 미쓰코시백화점

by 데일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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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명물 화신백화점


한양은 내사산(목멱산, 백악산, 인왕산, 낙산)으로 이어진 한양도성 18.6km가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4개의 외사산(관악산, 북한산, 덕양산, 용마산)이 서울을 더 넓게 둘러싼다. 현재 서울의 경계이다. 서울의 젖줄인 한강이 외사산을 가로지르는 한강이다. 조선시대의 한양은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다. 그 것을 관통하는 하천이 청계천이다. 청계천은 인왕산(백석동천,옥류동천), 백악산(중학천), 남산(동소문천 등)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들어 서울의 중심부를 흐른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서울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눈다. 북촌이라는 지명은 최근에 쓰는 지명이다. 전에는 상촌, 우대, 혹은 웃대라 하여 청계천의 윗동네라 불렀다. 남촌은 청계천을 기준으로하여 아래 지역를 말한다. 북촌과 남촌은 한양에서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북촌이 궁궐이 있는 곳이라 고관 대작이 헛기침을 하며 사는 동네라면, 고전소설 「허생전」에서도 등장하는 남촌은 권력에서 한 발 물러난 남산골 샌님이 사는 동네다. 이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권력에서 밀어낼 정도의 힘을 가졌다.



이렇게 정치 권력에서 한 발 비껴선 사람들이 살던 남촌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후에도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사대문 안에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1880년대 조선 정세는 외국인들을 무방비하게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남산 아래 햇볕이 쬐지 않아 늘 땅이 질어 사람들이 '진고개'라 불리던 동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이 곳에 일본인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부터 이곳은 왜병들이 모여 무술을 연마한 왜성대란 곳이었다. 이를 연유로 조선통감부와 통감의 관저가 들어섰다. 통감 관저는 이후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경술국치의 현장이 되었다.



그래서 청계천의 남쪽, 소위 남촌이라 부르는 곳은 일본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조선인 거주 지역, 북촌과 대비되었다. 강요된 근대의 요람이었다.

1997_4843_409.png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사장

북촌 화신백화점의 탄생


1987년까지 종각 건너편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화신백화점을 세운 박흥식이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물론 2천석 지주집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겨우 소학교만 졸업하고 고향에서 쌀장사를 하던 사람이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한양으로 진출한다. 황금정 2정목(을지로2가)에 사무실을 내고 '조선 최고의 종이회사' 선일지물(鮮一紙物)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일본 도매상의 훼방으로 종이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회사에서 직접 물건을 납품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자, 스웨덴의 종이가 최고라는 말을 듣고 일본의 스웨덴 영사관을 찾아 사정을 한다. 결국 일본의 종이보다 값싸고 좋은 제품을 납품받는다. 김성수의 도움으로 동아일보에 종이를 납품하는 등 사업은 속속 성장 했다. 박흥식의 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통업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상계의 중심, 육의전의 으뜸인 선전, 중국 명주를 팔던 자리에 1890년대 후반 신태화라는 사람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귀금속과 양복을 팔아 돈을 벌었다. 이름은 '신태화가 경영하는 상점은 믿을 수 있다'는 뜻의 ‘화신(和信)상회’이다. 이 노른자 땅에 있던 화신상회를 박흥식(朴興植1903~1994))이 접수했다.


그러나 산을 넘으면 또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최남이라는 사람이 화신의 건너편에 동아백화점을 열었다. 최남은 판매원의 상당수를 미모의 여성 점원으로 고용하여 많은 손님을 끌어들였다. 가격제를 정찰제로 하여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러나 채용 담당 임원이 여점원을 농락하는 일이 발각되어 더 이상 경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백화점은 박흥식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박흥식은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하여 북촌의 중심지 종로통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남촌에는 이미 네 개의 백화점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1997_4844_411.png 미쓰코시백화점은 6.25 당시에는 미군PX로 쓰였다.


1997_4845_4113.png 영화 '암살'의 한 장면

남촌 일본 백화점과의 경쟁


남촌의 중심은 센긴마에히로바(鮮前廣場, 조선은행 앞 광장, 현 한국은행 앞 광장)이다. 조선은행 앞의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네 개의 일본 백화점이 포진하고 있었다. 미츠코시 경성점(三越,현 신세계백화점)을 필두로 죠지아(丁子屋, 현 롯데호텔 영플라자), 미나카이(三中井, 현 밀레오레), 히라다야(平田, 현 고려빌딩) 등 네 개의 백화점들이 화려한 상품과 세련된 상술로 남촌의 일본인들을 장악하더니 북촌의 조선 사람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북촌의 박흥식이 경영하는 화신이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박흥식의 첫 번째 카드는 상품권 발행이다. 경성에는 뒷돈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돈을 주고받는 것은 꺼리는 법이다. 박흥식은 사람의 마음을 상술로 활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상품권을 돈 대신 이용했다. 상품권이 불티나게 팔렸다. 조선인의 민족 감정에도 호소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하고, 출옥 후 2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비운의 조선 왕족들을 초청하는 이벤트도 대박이 났다. 연이어 당시 최고의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내걸어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안정적 물품 공급을 위해 그는 오사카에 빌딩을 인수하여 사무실을 내고 필요한 상품들을 대량으로 싼값에 매수하였다. 결제도 현금으로 하여 더 할인 혜택을 받는 방법으로 가격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주요한을 고용해 광고와 마케팅을 담당하게 했다.


승승장구하던 화신은 1935년 1월 27일 인근 사과를 파는 과일가게에서 발화한 불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 굴복할 박흥식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에게 조선 최고의 건물을 부탁한다. 드디어 2년 만에 지하 1층, 지상 6층, 연건평 3,011평의 백화점이 탄생하니 이제 남촌의 여느 백화점과 경쟁하여도 뒤질 리 만무했다. 6층 자리 신축 건물은 엘리베이터를 완비한 초호화 건물이었다. 옥상에는 전광판을 설치하였다. 불빛이 점등하는 대로 글자가 쓰여지는 희한한 최첨단 네온 싸인 광고판이었다. 당시 경성의 최고의 자랑거리는 화신백화점 갔다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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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데일리아트 Daily Art(https://www.d-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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