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피아노 심포닉 ⓒPhilipp Schmidli
1월 중순, 파리 리용역을 출발한 기차는 네 시간여 만에 바젤을 거쳐 루체른에 도착했다. 루체른 역을 나와 바로 오른편으로 향하면 통유리로 지어진 현대적인 건축물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겨울 호수의 잔잔한 반짝임을 받으며 빛나는 이 건물이 바로 문화공간 디자인의 명수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루체른 문화 컨벤션 센터(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 이하 KKL)이다. 눈 덮인 고풍스러운 시가지 건물들과 대조를 이루며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내는KKL은 1998년 개관 이후 스위스 문화예술의 허브 역할을 하면서 루체른의 랜드마크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스위스의 음악축제 하면 교향악 축제로 유명한 《루체른 여름 페스티벌 (Lucerne Summer Festival) 》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루체른은 연중 페스티벌 모드가 이어지는 ‘음악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말년을 보낸 빌라 세나르가 루체른에 있고 리하르트 바그너가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함께 둥지를 틀고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곳 역시 루체른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1805년 창단되어 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Lucerne Symphony Orchestra)의 존재 또한 한몫 한다. 다채로운 시즌 공연을 통해 이러한 축제 분위기를 한층 북돋우고 있는 그들이 창설한 피아노 페스티벌 <르 피아노 심포닉 (Le Piano Symphonique)>이 올해로 4회째를 맞이 하면서 음악의 도시 루체른의 겨울에 훈훈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음악가들의 정기가 가득한 루체른의 겨울 풍광 속에서 펼쳐지는 페스티벌 현장을 공유한다.
르 피아노 심포닉 ⓒPhilipp Schmidli
앙상블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신(Evgeny Kissin)의 쇼스타코비치 - KKL Konzertsaal, 1월 15일 19시
차디찬 겨울비와 가느다란 눈발이 섞이며 내리는 가운데 페스티벌 관객들은 두꺼운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고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며 KKL로 들어섰다. 평소 익숙한 솔로 연주자 키신이 아닌 앙상블 피아니스트 키신의 면모를 보여준 무대는 컨셉부터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인기 스타들이 주로 쓰는 표현을 인용하자면 '키신과 그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쇼스타코비치의 실내악' 쯤으로 타이틀을 붙여볼 수 있을 듯 하다. 성악&피아노가 프로그램 서두와 마지막에, <피아노 트리오 2번 >과 <피아노 오중주>가 중앙에 배치되었는데 전체적으로 기악 파트보다 성악&피아노 파트에서 관객 측의 높은 몰입도가 느껴졌다. <피아노 오중주>에서는 키신의 피아노를 제외한 현악 파트, 즉 코펠만 콰르텟(Kopelman Quartett)이 현저하게 취약하여,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의 흐름을 감지하기가 매우 어려워 아쉬웠다. 그러나 <피아노 트리오 2번>에서 달라진 사운드가 관객 불만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어 다행이었다. 기에드레 디르바나우스카이테(GiedréDirvanauskaíté)는 크레머라타 발티카의 첼로 수석으로 기돈 크레머의 총애를 받으며 그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연주자인데 이번에도 역시 탁월한 앙상블 연주자로서의 정신과 돋보이는 기량으로 트리오의 밀도 있는 화합에 기여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성악곡들이 예상을 뒤엎고 이브닝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에 쇼스타코비치가 곡을 붙인 베이스와 피아노를 위한 <례브야드킨 대위의 네 편의 시>는 구소련에 대한 반정부 감정의 냉소적 표현이 관건인데 알렉산데르 로슬라베츠(Alexander Roslavets)는 풍자와 비아냥거림을 거리낌 없이 발휘했다. 억압 받던 유태인들의 고통을 표현한 곡으로 우회적 반정부 메시지가 숨어 있는 <유대 민족시에서> 순서는 첸 리스(Chen Reiss 소프라노), 라헬 프렌켈(Rachel Frenkel 메조 소프라노), 미하엘 샤데(Michael Schade 테너) 세 성악가의 탁월한 연기력과 키신의 작품 몰입으로 작품 본연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와 전람회의 공감각 - Kunstmuseum Luzern (1월 16일, 12:30 PM)
다니엘 치오바누(Daniel Ciobanu)의 프로그램은 동유럽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선보였는데 특히 러시아 정교 종소리와 피아노의 타악기적 질감이 키워드로 떠올랐다. 그는 로디온 체드린, 프리드리히 굴다, 무소르그스키, 에네스쿠,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을 엮어 강렬한 대비와 텍스처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했다. 특히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에네스쿠의 <종소리 야상곡>에서 느껴지는 음향적 요소들은 음악에 시각적인 성격을 부여하며 관객들의 시청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이 뮤지엄에서 연주된 점도 개연성 있고, 연주자가 표정을 통해 음악의 내용을 해석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브람스 드보르작 수크 작곡가 계보 - Kunstmuseum Luzern (1월 17일, 12:30 PM)
피아니스트 키벨리 되르켄(Kiveli Dörken)과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단원들이 함께한 무대는 선후배 작곡가 간의 계보에 집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말러의 <피아노 사중주>는 젊은 작곡가가 브람스의 낭만주의에 아직 젖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데, 주제 선율을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하고 탐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실험적 작품이다. 연주자들은 서로의 눈빛으로 교감하며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갔다. 평소 큰 연주홀에서 관현악으로 호흡을 맞추던 루체른 심포니의 단원들이 실내악 무대를 통해 조촐한 만남의 시간을 가지는 일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선사한 듯 하다. 실내악은 각 연주자가 개인적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동료들을 보다 인간적 접근으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중간 순서에서는 브람스의 4개의 <발라드, 작품 10>과 드보르작의 <13개의 시적 상상, 작품 85>, 두 작품이 키벨리 되르켄의 피아노 독주로 선보였다. 피아니스트는 발라드를 - 괴테의 서사시에 착안하여 여러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시도한 음악적 표현법 - 해석 방향으로 잡은 듯 하다. 두 작품을 하나의 서사시처럼 엮어서 표현 전달하는데 주력했다. 브람스는 드보르작을 적극 지원했던 멘토였고 두 작곡가의 음악 세계에는 보헤미안 감성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해석 맥락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 조제프 수크(Josef Suk, 1874–1935, 체코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의 <피아노 오중주, 작품 8 >는 그의 멘토였던 드보르작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자주 연주되지 않는 작품인 만큼 연주자의 해석과 전달 능력이 중요한 작품이기도 한데, 키벨리 되르켄과 루체른 심포니 현악주자들은 때로는 대결 모드로 때로는 합심 모드로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Adagio religioso 악장에서 첼로가 리드하는 부분에서 다른 멤버들이 경청하고 현악 사중주가 도드라지는 부분에서는 피아노가 물러나는 배려의 태도에서 진정한 실내악 에스프리가 배어나왔다. 말러에서 출발하여 브람스를 거쳐 드보르작에서 조제프 수크로 이어지는 작곡가 계보 탐색 여정으로 이번 루체른 음악 여행을 훈훈하게 마감했다.
르 피아노 심포닉 ⓒPhilipp Schmidli
르 피아노 심포닉 ⓒ 박Marine
음악 칼럼니스트 박마린 불어불문학 전공 후 도불, 프랑스에서 20년간의 대기업 업무 경력을 쌓은 후 파리 10 대학에서 예술경영 - 공연기획/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였다. 프랑스 공연 예술 평론가 협회 멤버이며, 하우스 콘서트 기획과 더불어 클래식 아티스트/공연기획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클래식 전문 디지털 매거진 클래식아쟝다 (www.classicagenda.fr/author/marinecantabile/) 및 월간 <음악저널>, <객석> 등 클래식 음악 전문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from France] 루체른 《르 피아노 심포닉》음악제 리뷰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