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주년을 앞 둔 3월29일 '창신동 예인을 찾아서' 답사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에는 본지 회원과 문화지평 회원 포함 30여 명이 참석했다. 문화지평은 본지 맛 칼럼니스트 유성호 기자가 이끄는 '인문을 기반으로하는 문화 그룹'이다. 보통 3월 마지막 주말은 꽃망울 터지는 소란스런 소리에 온 천지가 수근거리는 축복 받는 시기인데, 산불 소식과 어수선한 시국을 반영하듯 답사 당일에는 하루종일 눈보라, 추위와 바람에 시달렸다. 그러나 하수상한 계절과 대결이라도 하듯 30여 명의 답사원들은 창신동 절개지 이곳 저곳에 박혀 있는 예인들의 흔적을 이리저리 잘도 찾아다녔다. 답사는 본지 한이수 대표기자가 이끌었다. 함께 참여한 전수정 선생님이 답사 후기를 꼼꼼하게 기록해 주어서 고마움을 표하며 답사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낙산 정상에서. 답사팀은 데일리아트의 창간 1주년 기념사진을 찍었다.
답사의 출발, 동묘에서.
눈과 비, 바람이 오락가락하는 날, 동묘를 찾았다. 미처 다 둘러보지 못했던 창신동 일대를 다시 살피기 위한 걸음의 시작 지점이 동묘였다. 이른 시간임에도 부지런 떨어가며 장사 준비를 마친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없는 거 빼곤 다 있다는 이곳을 일찍부터 찾은 어르신, 외국인 들의 모습 또한 적잖이 보였다.
동묘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 서울의 동쪽에 위치했다 하여 동묘로 불린다. 이와 같은 사당이 서울에만 5개 가량 있다 들었다. 사당이라 하면 문인을 떠받드는 공간처럼 여겨지곤 했는데, 유학의 대가인 공자라면 모를까, 촉나라 장수인 관우를 우러러보기로 마음 먹은 이유가 무얼지. 여러 모로 독특한 공간은 이효석의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에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선망하는 도시인 경성(서울), 소설에서는 밝음 이면에 깃든 어두운 측면이 여과 없이 그려진다. 아직 읽어 보지 않은 작품이지만, 으스스한 날씨에 동묘를 마주하자 소설의 내용이 왠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동묘 일대에는 일명 '벼룩시장'이 있다. 시장의 원래 위치는 청계천 고가 아래였다고 하나, 청계천 일대의 변화와 DDP 건설 등이 이루어지면서 황학동, 신설동 등으로 이전해 지금에 이르렀다. 전 세계에 하나뿐인 구제품들을 구할 수 있는 제법 '힙'한 공간이어서 최근에는 젊은 층도 은근 이 공간을 누빈다.
벼룩시장 상품 진열 모습
벼룩시장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판매하는 물건이 말끔하지 않아, 노점 단속 시 판매상들이 벼룩 마냥 도망쳤다고, 판매상들이 전국을 오가며 물건을 수집하는 모습이 마치 벼룩과 흡사하다고 등등. 전국에 널려 있는 ‘도깨비시장’ 또한 비슷한 사정을 지니고 있음을 떠올리자 이 공간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왔다.
평화시장 뒷골목이었던가. 좁은 골목을 관통했다. 바로 옆으로는 2층 높이의 건물이 있었는데, 원래는 삼일아파트라고 했다. 해당 건물은 김현옥 서울시장 재임 시 지어졌다. 청계고가를 놓으면서 주변의 판자촌들을 모두 철거했는데, 여기에 살던 주민들을 위한 거주 공간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1~2층은 상가, 3~7층은 주거용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주상복합 아파트에 해당한다.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노후한 아파트의 운명을 두고 저울질이 행해졌다. 정비하는 입장에선 마음 같아서는 전면 철거하고 세련된 모양새를 갖추고 싶었을 터이나, 이곳이 생활 터전인 이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가 쉽진 않았다. 그 결과, 3~7층이 잘려 나가고 현재는 2개 층만이 남았다.
좁은 면적의 가게들 중 먹거리를 판매하는 곳들이 은근 보였다. 고기 튀김이 맛이 괜찮다고 하던데. 아직 배가 고플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방앗간 앞을 그냥 못 지나치는 참새 마냥 격렬히 반응하는 배꼽시계를 잠재우고자 노력해야 했다.
박수근 집터에 쓰여진 유홍준 교수의 글씨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
지난 답사에서도 들른 박수근 집터를 다시 찾았다. ‘월드 부동산’, ‘낭만낙지’ 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은 원래 현재보다 더욱 컸는데 도로를 만들 때 일부가 잘려 나갔다. 건물 앞에 박수근의 집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바닥에 그 사실을 새겨 넣은 글자도 있었으나, 이를 눈 여겨 볼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그보다는 건물 측면에 남은 유홍준 교수의 글씨(‘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가 더욱 눈길이 갔다.
건물과 땅의 명의자가 서로 달라 쌓인 스트레스도 화가의 이른 죽음에 힘을 보탰을까.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바람처럼 떠난 이를 추모하기에 공간은 지극히도 밋밋했다.
얼핏 보아도 오랜 시간이 느껴지는 동대문아파트를 지났다. 1967년 완공. 아파트가 드문 시대, 백일섭, 이주일 등 연예인이 다수 거주했으나 이제는 아니다. 서울 중심부이긴 해도 상대적으로 저렴해 외국인 노동자나 어르신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듯했다. 오래된 아파트가 그러하듯 이곳도 미음 자 형태의 중앙정원을 갖추었다고 한다. 지나가던 길이요, 개개인의 사적 공간을 침범하는 건 실례일 터이므로 호기심 충족을 위한 욕심은 접었다.
백남준기념관을 들어서는 답사팀
다음 장소는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라 이름 붙은 공간이었다. 실제 백남준이 거주하던 곳은 아니며, 내부의 물건 다수도 백남준이 실제 사용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공간이 위치하게 된 까닭은 일대에 3천 평에 달하는 백남준 가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다. 그의 집안은 당시 우리나라에 단 2대뿐이던 캐딜락을 보유했다. 출국 순번이 곧 여권 번호이던 시절, 백남준의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는 소리도 있다.
아버지 백낙승은 사업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나라 잃고 엄혹했던 시절, 백낙승은 일본군에 군복을 납품하며 차곡차곡 부를 축적하는 한편,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자신의 안위를 도모했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대가로 막대한 재산을 국가로부터 불하 받기도 하였다. 그저 시류를 읽는 측면에서 탁월했다고 하기에는 왠지 씁쓸하다만, 이와 같은 환경이 백남준이 예술혼을 맘껏 발산하는데 도움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혁신’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경계를 뛰어넘어, 순수예술과 현대문명을 접목해가며 구축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는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다만, 나와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그가 선보인 작품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설치 예술은 작품을 구성하는 부속품(이를 어찌 지칭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의 고장에 대처하기가 난해하다는 문제가 있다. 만일 작품에 사용된 텔레비전이 더는 작동하지 않았을 때 부품을 갈아 끼우는 행위가 작가의 작품 의도 훼손은 아닐지. 몇 백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유화나 대리석 조각품 등에 비한다면 너무도 나약한 셈이다. 어쩌면 그것이 현대 문명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창신동에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가수 배호도 살았다
요절한 가수 배호가 거주했던 집(현재는 ‘낙산 냉면’이라는 음식점이 영업 중)을 지났다. 이 무렵부터 원단 따위를 실은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가는 모습을 접했다. 이는 창신동 일대에 존재하는 다수의 봉제 공장이 제 존재감을 뽐내는 방식과도 같았다.
지금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 많은 공장이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전한 상태로, 동네 분위기가 고요한 편이다. 허나 불과 반 세기 전만 하여도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을 듯했다. 김광석이 졸업했다는 창신초등학교의 경우, 한 학급의 학생 수가 100명을 넘나들었다. 아이를 너무 많이 낳는 걸 우려했던 시대답게, 1만 명을 넘나드는 재학생 수를 자랑하는 국민학교도 다수였으며, 2부제, 3부제 수업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수업을 위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한국전쟁 당시 몰려오는 중공군의 모습과 오버랩 됐다는 식의 이야기가 존재하겠는가.
잠시 안양암이라 이름 붙은 사찰에 들렸다. 창씨 개명 접수처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로 한 때 짙은 친일 색채를 지녔었다는 이 곳. 바로 옆 거대한 바위가 무척이나 이색적이었으며, 바위에 놓인 비석에 새겨진 이름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양암, 절개지에 세운 절이다
배정자. 통도사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간 그녀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이토 히로부미 양녀(애첩?)가 되어 밀정교육을 받고 조선에 잠입했다. 고종 등 당대 지배층과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등 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던 그는 이토 히로부미 사망 후 일본군에 들어가 만주에서 독립군 소탕에 앞장서는 등 (일제 입장에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찰에 놓인 비석을 통해 그녀가 여자 신도들을 대표하는 위치(고문, 회장 격)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친일파로 역사에 기록됐다. 명예에 죽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그에게 이는 하등 영양가 없는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천수를 누렸다. 1870년생인데 1952년에 사망했다. 100세 시대라곤 하지만 80에 채 이르지 못해 사망하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많음을 감안한다면 그는 꽤나 장수한 편에 속한다. 왜 우린 그와 같은 인물을 철저히 단죄치 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나, 그 시절보다 오히려 현재 친일파가 더 많은 거 같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자연스레 다리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김광석이 결혼하기 전까지 살던 집
창신5길 47. 김광석은 6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이후에도 어머니(이달지 님)가 건강 악화로 2013년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니, 김광석을 언급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가 태어난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는 '김광석 길(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라 하여 테마 벽화거리가 조성된 반면, 이곳에는 김광석을 추억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아버지 김수영의 이름이 적힌 국가유공자의집 명패만이 유일한 연결고리였으나, 이마저도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상태라 글씨를 판독하기가 버거웠다. 제2 의 김광석 거리 조성이 이루어진다면 이곳이 제격이 아닐까? 이야기를 계속 꽃피우기에는 이어진 계단길이 무척이나 가팔랐다.
바느질 할 때 손가락에 끼는 골무를 형상화한 산마루놀이터
제법 높은 지대, 탁 트인 시야를 기대할 수 있는 곳에서 산마루놀이터를 만났다. 숭인동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는데, 놀이터임에도 놀이기구가 보이지 않는 게 독특했다. 공간 한가운데 봉제공장하면 떠오르는 '골무'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었다. 조형물은 전망대를 겸했다. 내부 나선형 계단을 따라 걷거나, (어린 아이라면) 가운데 정글짐 같은 구조물을 타고 오르면 전망대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다.
우박에 가까운 눈이 내린 터라 전망대의 바닥이 다소 미끄러웠다. 투명한 유리에 가까운 바닥 재질이 나에게 두려움을 살짝 안겨다 주었다. 그래도 하늘이 푸르고 꽤 먼 곳까지 조망 가능해 힘겹게 오른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전망대를 빠져 나오는 길에 창신동 절개지를 마주하기도 했다. 인위적으로 깎여 나간 바위 위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찬 집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갈 곳 없는 이들이 거듭 밀려난 끝에 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인 형국이다. 약간의 낭만을 담아 '달동네'로 칭하던 동네들은 수년 동안 행해진 재정비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간의 재배치는 모두에게 폭력적이다. 이를 기획한 이들과 그로 인해 쫓겨난 이들이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잊는다.
쉼 없이 부는 바람에 슬슬 몸이 떨려온다. 숨을 참아가며 꽤 높은 곳까지 올랐으므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알록달록, 한동안의 포근한 날씨에 꽃이 죄다 피었다. 이름을 불러주면 다가와 의미가 된다 하므로 매화, 산수유, 개나리 등, 그것이 맞는 이름인지 여부도 모르면서 서울 촌놈은 살가운 척을 해댔다.
낙산 정상에 오르면 목멱산, 인왕산, 백악산, 보현봉, 도봉산, 불암산 등 서울을 둘러싼 모든 산들을 다 볼 수 있다
밀레와 박수근, 박수근과 고흐, 이중섭과 박수근, 박완서까지. 몸의 피로를 녹이는 시간은 마음의 살을 찌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소재를 달리 표현한 그림을 통해 화가의 성정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소박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는 투박, 주체 힘든 에너지의 발산이 빚어낸 격정 등이 혼탁한 시대상과 뒤섞이면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전쟁으로 모두가 헐벗고 고달팠던 시절, 살기 위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행상에 나섰던 여인들과 빈 주머니에 헛헛함을 느끼며 시장 주변을 배회하기 바빴던 남성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며 예술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박완서의 옛집이 있는 터 부근까지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한양도성과 맞닿은 곳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딸이 신여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 꿈을 이루려면 사대문 안에 거주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녔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써 내려갔을 작품 『엄마의 말뚝』의 한 구절을 함께 음미하기에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낙산공원 이상으로 좋은 장소는 없지 싶었다
[창간기념 행사 1-창신동 예인을 찾아서] 답사 후기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