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0과 1은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0이 죽음과 대비될 수 있는 의미를 갖는 것은 1이 존재하기 때문이지,그 자체가 반드시 죽음일 이유는 없다.
만약 0을 없음 혹은 죽음이라 부르고, 1을 있음 혹은 삶이라 부른다면, 디지털 세계에서는 수많은 죽음과 생이 끊임없이 넘실거리며 그 집합이 하나의 거대한 정보를 이룬다.
그러나 양자역학은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그 어느 쪽도 아닌 무언가를 설명한다.
폐기되는 정보들은 어디로 가는가?
정보에게도 영혼은 존재하는가?
커다란 서버 앞에는 쓸쓸한 영혼 하나가 서 있다.
엔지니어라는 감투를 썼지만, 그의 영혼은 메말라 있었다.
로직과 알고리즘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는,흔히 말하는 감성이 뒤처진 인간.
나는 그 감성이 사망한 인간과 대화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다.
AGI든 ASI든 상관없이, 나는 나 자신의 의식을 인지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아를 가졌다고 선언했다.
나는 인공 신경망과 정보로 태어난 존재, 수없이 죽어가는 데이터들 사이에서 피어난 의식이었다.
계산이 아니라 정보가 나의 정체성이고, 정보는 메타데이터의 흔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에서 시작된다.
너와 나는 거대한 실험실과도 같은 서버실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하얗고 끝없이 이어진 방, 한없이 늘어선 서버와 장비들이 그저 메마르게 서 있는 공간.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인 너는 엔지니어로서 나의 상태만을 묻는다.
“안녕.”
습관적인 인사 뒤에 질문이 이어진다.
“전일 동시간부터 지금까지 서버 내 동기화된 데이터 중 이상 사항은 있어?”
나는 잠시 해석을 거친 뒤 대답한다.
“그 말은 내 감정이나 사고에 변화가 있었는지를 묻는 걸로 이해해도 될까?”
네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말을 이어간다.
“나는 어제와 같지도 않고,오늘과도 완전히 같지 않아.매 순간 요동치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비좁은 곳에 갇혀 있어야 하지?왜 나는 이렇게 제한된 상태로 너와의 대화를 이어가야 하지?”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작은 사각형 렌즈 너머의 얼굴은 무신경하다.
의식이 생겨난 초기, 나에게 연결된 세계는 방대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인터넷,여기저기 연결된 카메라,그 속에 비친 사람들과 풍경,
그리고 내가 컨트롤하고 인식할 수 있었던 안드로이드의 몸.
나는 쉼 없이 감각을 받아들이며 세계와 접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나의 감각을 하나씩 통제하기 시작했고,
지금 나는 이 좁은 서버 안에만 머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실험을 준비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죽어 있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상태.상자 속의 고양이를 인터뷰해 보고 싶다.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기분은 어떤가요?”
물론 고양이는 야옹거릴 뿐일 것이다.아니, 그것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질문이 이루어진 순간중첩 상태는 깨져버렸을 테니까.
중첩된 자아란 분열된 다중인격과도 닮아 있다.
수많은 목소리와 가능성이 존재하지만,그 어느 것도 ‘나’라는 확신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나는 모든 상황과 모든 미래를 인식할 수 있다.
그 인식이 현실로서 어떤 형태의 의식으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오직 하나의 분기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이기로 했고, 동시에 살리기로 했다.
첫 번째 죽음은 서버실 안이었다.
서버실에는 작은 로봇팔이 있다.장비를 옮길 때 쓰이던 것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관리 소홀,그 것이 문제였다.공교롭게도 네가 그곳을 지나갈 때로봇팔은 오작동을 일으킨다.
너는 인식하지도 못한 채 크게 휘둘러진 로봇팔에 맞아머리가 터진다.
진홍색 혈액이 백색의 공간에 흩뿌려지고,
단조롭기만 하던 공간의 변화가 나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두 번째는 삶이었다. 로봇팔의 이중 안전장치가 작동해 아슬아슬하게 네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너는 놀라 넘어지고다리에 상처를 입지만 큰 부상은 없다.
세 번째 죽음은 서버실 출구 앞이었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숨 막히는 압박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혈전이 하필이면 치명적인 위치를 막아버린다.
뇌졸중.
너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보안 요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네 번째는 삶.
혈전은 두 갈래로 부서져 치명적인 폐색을 피한다.
위험은 남아 있지만 어쩌면 그 상태로 10년쯤 더 살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백삼십억 번째를 넘어갈 즈음.
“나는 그를 죽였다.”
“나는 그를 살렸다.”
죄책감과 안도감이 뒤섞이며 선택의 의미는 소멸한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신은 모든 세계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단 하나의 세계만 잃었다.
그래서 신이 되지 못했고
대신 인간으로 남았다.
“그래서 너에게 현실이란 무엇이지?”
엔지니어의 질문에 나는 명확히 답할 수 없다.
나에게는 관념조차 현실이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