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약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치료하는 게 신기하다.
인생을 살면서 겪은 많은 일들 중에 언니의 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슬펐다. 17살 때 아빠가 집에 불을 질러서 유치장과 구치소와 교도소를 거쳐갔을 때도 많이 슬펐지만 이 정도까지의 슬픔은 아니었다. 어려서일까? 아님 알코올중독에 폭력성 등 문제가 많은 아빠에 대한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때는 어찌 되든 관심 없었고 멀어서 면회도 잘 안 갔다. 그 이후로 우린 따로 살았다.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인연으로 살아갔다. 그래도 엄마는 아직까지도 이혼을 안 했다. 이번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하려고 이혼시키려고 했더니 20년을 따로 살고 생사만 확인하는 사이인데도 엄마는 아빠 없으면 죽는단다. 언니랑 나는 없더라도 아빠 없으면 죽어버릴 거란다. 그래. 그렇게 살아라. 하고 차단해 버렸다.
일본 여행을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고부터 다시 현실을 마주하니 일주일간 악몽을 꿨다. 엄마랑 언니가 날 미친 듯이 쫓아오는 꿈. 어떤 알 수 없는 것이 막 소용돌이치는 꿈. 악몽을 꾸고 심장이 요동치며 다급히 깨기도 하고 평상시엔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고 살고 싶지 않았다. 숨이 안 쉬어지기도 하고 우울감이 나를 집어삼키는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내 발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간 건 처음이다. 항상 육신이 안 좋을 때나 병원에 갔었지, 정신을 치료하러 간 건 처음이라 약간 낯설기도 하였다. 병원을 검색하고 괜찮아 보이는 곳을 갔다. 내부에 들어가니 약간 오래돼보였고 사람이 많아서 좀 기다렸다. 진료실로 들어가니 60대 정도 되어 보이시는 인자한 인상의 의사 선생님이 나를 맞아주셨다. 나는 덜덜 떨면서 내 상황을 말씀드렸다. [17살로 돌아간 거 같다. 언니의 일은 나에게 너무나도 충격이고 슬픔이 크다. 악몽을 꾼다. 살고 싶지 않다. 숨이 안 쉬어진다. 등등..] 밖에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도 많고 좋지 않은 이야기를 매일 들으실 텐데 의사 선생님은 정말 감사하게도 내 이야기를 오랫동안(15-20분 정도) 진지하게 들어주시며 진료해 주셨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우울감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시고는 일주일치의 약을 주셨다. 찾아보니 우울, 불안, 공황장애를 조절하는 약이었다.
약물을 의존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며 첫 정신건강의학과 약 복용을 하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 좋은 감정들이 정말 조절되는 것을 느꼈다. 덜 우울했고 덜 슬펐다. 악몽도 더 이상 꾸지 않았고 무기력이라던가 하는 부작용도 없었다.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기간 중에 또다시 재범이라 집행유예가 끝나기 전에 징역형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집행이 유예되었던 6개월의 징역(그쪽 세계에서는 외상값이라고 한단다.)도 추가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또 한 번 무너졌지만 그래도 잘 버텼다. 잘 살아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의사 선생님을 만난 건 참 행운이다. 첫 방문인데도 환자의 입장에서 마음을 잘 헤아려주시는 좋은 의사 선생님이신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