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 Sep 03. 2020

밥솥이 모든 걸  다 해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다른 가전제품은 몰라도, 밥솥은 모든 걸 다해주는 게 맞다. 빨래를 살펴보자. 빨래는 빨래를 모아두었다가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여기까지는 세탁기도 꽤나 모든 걸 다 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경쾌한 종료음이 울리고 나면 비로소 인간의 몫이 시작된다.  빨래를 꺼내 널어야 하고 다 마르면 걷어서 개야 하고, 우리 집에는 아직까지 없는 과정이긴 하지만 다림질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번엔 청소기를 볼까? 청소기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청소기에게 힘을 빌리는 부분은 쓰레받기질 정도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쓸고 청소기는 먼지를 빨아들이는 흡입 쓰레받기가 된다. 그러니 집이 넓다면 정말 청소기는 고오급 자동화 쓰레받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이 허리를 굽혀가며 집안을 열심히 돌아다녀야 청소가 된다. 청소기가 다이슨인지 엄청나게 커다란 흡입 통을 지닌 후버 청소기인지에 따라 노동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 개념은 같다. 돌아다녀야 청소가 된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없는 로봇 청소기는 논의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로봇 청소기가 있어도 청소기 또 돌리는 것 같던데...) 하지만 밥솥은 모든 걸 다해주는 게 맞다. 엉뚱한 짓만 하지 않으면.


전기밥솥으로 밥을 할 때 인간의 몫이란 쌀을 씻는다. 밥을 푼다. 정도이다. 우리 집이라면 다 된 밥을 작은 용기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는 프로세스가 더해질 것이고 다른 집도 이보다 한 단계 더 많거나 적거나 할 정도로 아주 간단하다. 전기밥솥이 있기 전에는 불에 올리는 압력밥솥이 있었고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 불 조절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하는 날에 짠! 죽, 밥, 탄 누룽지의 삼층밥이 완성된다. 하지만 전기밥솥은 완벽한 불 조절로 그럴 일이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떠나고 며칠 후로 돌아가자. 우리 집은 밥을 한 번에 많이 해두었다가 데워먹는 2인 가구에게 딱 맞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한 공기 분량으로 전용 용기에 담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데워먹으면 된다. 밥솥에 밥이 오래 있으면 쉬기도 하고 딱딱해지기도 하므로 이렇게 데워먹는 것은 엄청 효율적이다. 그리고 요즘은 전용용기의 엄청난 성능으로 데워서 먹어도 갓 한 밥 같은 자태를 뽐낸다. 여하튼 이러한 시스템으로 엄마가 떠난 후에도 며칠간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는 밥이 떨어졌고 밥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지나치게 비장하게 말했지만 밥하는 건 정말 별 것이 아니다. 쌀을 원하는 분량만큼 씻고 물을 손등 높이까지 채워서 취사 버튼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손등 높이란 어디까지인가. 물론 밥솥 전용 계량컵을 사용하면 그 컵수에 맞춰 물높이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게 밥솥이지만, 우리 집에는 전용컵 따위는 없다. 잦은 이사로 없어졌기 때문에  양은 순전히 감각을 따라야만 한다.  그래도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손을 밥솥에 넣고 생각한다. 이게 손등까지인가


사람의 손은 천차만별이다. 손이 큰 사람 작은 사람 두꺼운 사람 얇은 사람.  모든 변수를 무시하고 요리의 애매모호함은 결국 궁극의 '적당히' 해낸다. 손등 높이만큼 넣어. 손을 빼고 나니 물이 좀 적어 보인다. 물을 좀 더 넣는다. 이번에 너무 많은 것 같다. 물을 좀 뺀다. 한참을 물과 씨름하다 " 아 몰라! 익기만 하면 되지 좀 질든, 좀 되든 무슨 상관이야? "한다.


밥 짓는 냄새가 풀풀 나면서 실패할 수 없는 밥솥의 마법에 대해 맹신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있던 물 양에 대한 의심을 모두 버렸다. 그리고 울리는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소리에 의기양양하게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오 괜찮아 보이는데? 거봐! 다 된다니까? 빨리 퍼보자!"

하지만 겉으로 보이기에 괜찮아 보였던 밥은 주걱을 대자 주방 곳곳으로 흩뿌려졌다. 물의 양이 너무 적어서 밥이 되다 못해 설익을 지경까지 갔고 밥알 하나하나는 찰기 하나 없이 눈처럼 흩뿌려진다. 주방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서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이다. 전화찬스가 필요하다.

"엄마!!!!!"

엄마의 조언으로 물을 두 컵을 더 넣고 다시 밥솥을 가동한다. 다행히 밥은 어느 정도 먹을 수 있게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밥솥을 너무 맹신한 대가로 정말 되고 눈물나게 딱딱한 밥을 며칠 동안 먹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시도에는 겁을 먹고 물을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며칠동안 떡을 먹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밥솥도 모든 걸 다 해주지 않았다. 설익어 서걱서걱한 밥이나 질어서 떡이 된 밥을 먹지 않으려면 적절한 물 양을 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뭐 쟤가 다해주는데'라는 말은 속 편한 말이다. 집안일 초보는 상상도  , 어떤 지점에서건 일을 망칠  있다. 이렇게 경험치가 쌓여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