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 Sep 10. 2020

집안일의 유령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과 그의 동업자였던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나온다. 스크루지 영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이 보여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본다. 타인에게 인색했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과거와 현재를 반영하는 외롭고 비참한 미래의 자신을 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디킨스가 대문호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21세기 지구 반대편에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불효녀에게도 같은 교훈을 준다는 .


내가 집안의 아무것도 안 하는 막내딸이었던 시절, 나는 , 뭐랄까, 정말 싸가지가 없었다. 밖에서야 일도 열심히 하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척척하는 사람이었다지만(진짜로?),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차려주시는 밥 먹고, 설거지는 나 몰라라했다. 빨래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그 와중에 방은 돼지우리였다. 그리고 치우라는 엄마의 말에 "어차피 더러워질 건데 뭐하러 치워?"라고 하기까지... 정말로 나는 싸가지가 없었다. 핑계야 있었다.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 지금 생각해보면 얄팍하고 너무 창피한 핑계다. 자기가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누워서 투덜투덜 대는 꼴이란...


엄마가 전주 언니 집으로 가고 집안일의 유령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저절로 되지 않고, 먼지는 스스로 청소기로 들어가지 않는다. 화장실은 원래 그렇게 깨끗한 곳이 아니고, 쓰레기통은 치우지 않으면 스스로 절대 비워지지 않는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나의 몫으로 돌아가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못돼 처먹은 딸이었구나. 엄마는 빨래도 하고 먼지도 털고, 청소기도 돌리고,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 와중에 겨우 나한테 네 방 정도는 네가 치워라 라는 말을 했는데 손가락 까딱 안 하는 딸은 "에이 이 정도면 됐지... 뭘 치워?"라고 하고 겨우 설거지 한번 하면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니...지금의 내가 가서 뒤통수라도 때려주고 싶다.


과거의 유령은 빨래가 쌓이면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 빨래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나를 보여줬다. 현재의 유령은 먼지가 쌓인 집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절대 엄마만큼 해낼 수 없는 내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와 현재의 유령이 지나가고 나서 미래의 유령이 찾아왔다. 냄새나고 더러운 집에서 혼자서 외롭게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내 모습... 이제 회개의 시간이다.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

"응~ 왜 우리 딸"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냥 삼켰다. 엄마는 내가 왜 이렇게 전화를 자주 하는지 모를 거다. 나는 종종 집안일을 하다가 울컥하고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엄마의 안부를 묻고 다시 일을 한다.  스크루지는 회개를 하고 용서받았지만 나는 아직 용서를 구할 준비가 안되었다. 엄마가 다시는 나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안일, 그 완벽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