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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Oct 20. 2022

이 여행 반댈세!

치매도 육아처럼 23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의 어원은 '일하다'는 의미의 ‘travail’이고 이 단어는 고통, 고난이라는 뜻으로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어딘가로 향하는 일 자체가 고행이었을 테니 수긍이 된다.

 나도 여행에 앞서 설렘은 잠깐, 곧이어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수고로움이 예측되어 슬그머니 눌러앉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면 다시 챙겨 먹을 수 없는 한 끼 밥처럼(^^) 여행도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가기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두 말 않고 준비물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결혼 후에는 남편 덕분에 여행에 관한 이야기보따리가 더욱 많아졌다.

 그중에는 어머니와의 추억 보따리도 제법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꼬꼬마 때부터 할머니 따라다닌 내 여행의 역사를 통해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로 그 만족도가 달라진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하게 되었는데 그 점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는 여행은 처음부터 그 목표를 하향 설정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가 시어머니 눈치 안 보는 천방지축 며느리지만 그래도 어른을 모시고 여행하려면 신경 쓸 게 늘어나기 마련이라 그에 따라 피로감은 쪼꼼 쪼꼼 쪼꼼 늘어나고 만족도도 야금 야금 야금 떨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어머니는 우리와 여행하는 게 마냥 즐거우실까? 하핫;;

 혼자 사는 어머니가 맘에 걸려서 신혼 때부터 치매 발병한 해까지 여름휴가는 항상 함께 했고 워낙 이사를 많이 다녀서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근처 관광지도 두루 섭렵했으니 어머니의 여행 취향을 모를 수가 없다.

 어머니는 일흔 후반까지도 뛰어다닐 만큼 건강해서 어지간한 일정은 무리 없이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워낙 럭셔리한 숙소와 음식이 제공되는 곳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돌아보는 여행을 좋아하시는 터라 우리의 현장감 뿜 뿜 하는 가성비 여행과는 이미 스타일이 너무 다르고 한창 자라는 아이들의 체험 위주로 스케줄을 채우다 보면 어머니의 취향은 뒤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여행의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 있으니 이모저모 불만족스러워도 의견 하나 내놓지 못하고 별 수 없이 따라나서곤 했다. 그래도 여행은 하고 보는 거라고, 어머니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어쨌거나 여행은 끝나기 마련이고 찍어 온 사진을 나누며 그 시간을 추억할 때쯤이면 이미 불만의 'ㅂ'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행은 그 모든 아쉬움과 불만을 잠재울 만큼의 매력이 차고 넘치는, 일상의 조커 카드 같은 것이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치매진단을 받을 무렵부터 더 이상 함께 여행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떠난 여행 내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가 하면 속상했던 어느 한 시절의 이야기를 끝없이 끄집어내어 위로받기를 원하니 조커 카드 같은 여행은커녕 손에 든 카드를 몽땅 집어던지고 집으로 조기 귀환하고 싶어졌다.

 결국 남편이 어느 여름 여행을 마치고 어머니를 내려 드리고 오는 길에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제 엄마랑 여행은 안 하는 게 좋겠어."

  



 남편의 선언 이후에도 시댁 단체 가족여행은 유지되었다.

 어머니의 생신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신정 휴일까지 붙여 생일 축하모임을 겸한 여행을 해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형님이나 아주버님 가족이 함께 하면 어머니의 하소연 대상도 늘어나고 왁자지껄 소란에 분위기 전환도 수월했기 때문에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중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된 일본 여행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어머니 팔순을 기념하여 떠났던 그 여행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어쩌면 치매환자를 향해 가슴 깊숙이 측은한 마음을 품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치매 진단을 받고 난 이후에도 어머니는 가까운 분들과 해외여행을 다니셨는데 여행 때마다 어려움(조금 전에 샀던 기념품을 또 사거나 돈이나 귀중품, 쇼핑한 것을 도둑맞았다고 다른 사람을 의심해서 트러블을 일으키는..ㅜㅜ)을 겪게 되자 전담할 보호자 없는 해외여행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다들 동행하기를 꺼려해서 한동안 여행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해만에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만의 여행인지, 몇 번째 여행인지 헤아려보며 (말씀하실 때마다 횟수는 달라졌다^^) 무척 즐거워하셨다.

 나는 여행에 지장이 없도록 여권이며 옷가지나 소지품을 미리 챙겨서 우리 집에 가져다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상태를 잘 알고 컨트롤도 잘할 수 있으니 내가 어머니를 밀착 케어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 그때까지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첫날, 저녁에 도착해서 숙소 근처에서 식사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자다 깨면 낯선 방에서 화장실도 찾지 못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한 방에 잤다. 왜 집에서 안 자고 여기서 자냐고 자꾸 물어보는 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여행 온 사실을 일러드리고 쉽지 않은 밤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겨우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가 어디야? 참 이상하다, 내 이불도 아니고."

"어머니, 소변 마려우세요?"

"응,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이상해.."

"우리 지금 일본으로 여행 왔잖아요, 화장실은 이쪽이에요."

"일본? 웬 뚱딴지같이 일본? 도대체 꿈인가 생신가 모를 일이네"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한참을 의아해하며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겨우 달래 재웠다.

 그렇게 밤잠을 설친 어머니를 모시고 1월의, 제법 추운 후쿠오카 일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걷는 곳이 일본인지 한국인지 모르고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하고 지루할 때면 집에 가겠다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지만 관광지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며 대체로 즐거워하셨다.


 "나 참 잘 걷지?(헥헥) 내가 은행 다닐 때 주말마다 상사들 모시고(헥헥) 등산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헥헥헥)"

 "정말 잘 걸으시네요! 한국 일본 망라해도 어머니가 그 연세에선 1등! 1등!"


 잘 걷는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는 와중에도 숨 가빠하는 어머니를 좀 쉬게 해 드릴 궁리는 하지 않고 입에 발린 감탄사만 남발하며 걸음 빠른 가족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뒤에서 밀면서 내 팔 아픈 걸 더 느끼는가 하면, 쇼핑을 좋아하는 어머니인데 집에 정리할 물건이 더 쌓이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소모 가능한가 아닌가 따져가며 섣불리 구매하지 않도록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여행의 큰 즐거움을 제한하기도 했다.

 당시엔 어머니를 챙기느라 나도 만만치 않게 여행의 즐거움을 제한당했기 때문에 별다른 죄책감도 없었다.

잘 따라오나 뒤를 살피는 큰 아들과 뒤처지는 자신을 연행(^^)해 가는 둘째 아들을 향해 "늙은 애미를 이리 끌고 다니냐?" 하며 애정 어린 눈흘김을 하던 어머니

 

 그렇게 종횡무진 누비며 3박 4일의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며칠간의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 한참 후에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내 옆에 주무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로


 "휴우... 이래 살아서 뭐하나..

  이제 고만 살고 싶다..."

 "어머니?"

 "드르렁 퓨~~ 드르렁 퓨~~"


 혹시 깨어서 맑은 정신으로 말씀하시나 하고 어머니를 불러보았는데 대답 대신 코 고는 소리...

 치매환자는 잠꼬대를 심하게 한다. 의사 선생님도 진료할 때 꼭 체크하는 점이기도 하다.

 여러 번 잠꼬대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날의 잠꼬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목소리가 너무 처연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


 어머니.. 너무 힘드셨군요..

 저는 효도여행이라 생각하며 내 수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ㅜㅜ

 

 치매는, 인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별안간 솟구친 눈물에 혼자 당황해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꼬대로 "이 여행 반댈세!" 라고 크게 외쳤다면 조금이나마 죄송한 마음이 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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