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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Nov 20. 2022

시어머니에게도 친정은 있다

치매도 육아처럼 24

 큰 오빠, 언니, 작은 오빠, 여동생.

 어머니에겐 네 분의 형제자매가 있고 그들과 결혼한 배우자들과도 수십 년을 피붙이처럼 지내왔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의 아버지는 전쟁포로로 끌려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고 남은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신산한 피난살이부터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가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서로에게 누구보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형제자매였기에 만나면 웃음꽃을 피우며 힘들었던 시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새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결혼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의지했던 오빠와 형부, 제부가 시간차를 두고 돌아가셔서 지금은 작은 오빠 내외와 언니, 동생이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을 믿기 어려워하며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그분들을 보고 있자면 나와 자매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어느새 혈연의 경계선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 애틋한 가족애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그 느낌 나도 잘 아니까,

 친정엄마도 당신의 피붙이 만나는 것을 세상 둘도 없는 기쁨으로 아셨기에,

 나는 어머니도 다르지 않으리라 여기며 꽃이 예쁜 날이나 단풍이 고운 어느 날 남편을 앞세워 그분들과 식사하고 환담할 자리를 만들어 드리곤 했다.

 어머니뿐 아니라 시외삼촌, 시이모님, 시숙모님까지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고맙다며 우리 부부에게 과분한 칭찬세례를 퍼부어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어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다시 자리를 마련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날 때마다 어머니의 병세가 어떤지 살피며 마음을 졸이던 어른들은 어머니가 우리 옆 라인으로 이사하자 누구보다 환영하고 기뻐했다.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했니? 참 고맙다! 네가 힘들겠지만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 고맙구나, 고마워!"


 삼촌, 숙모, 이모 너나없이 입을 맞춘 양 같은 멘트로 고맙다고, 안심이라고 하는 인사를 받으며 그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다가 불현듯 '앞으로 이분들이 어머니댁에 수시로 방문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손님 접대까지 내 몫이 되는 거 아니야?'라는 불안감이 빛의 속도로 엄습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는 곧 나에게 시월드가 아닌가!

 시월드라면 덮어놓고 멀리 하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쩜 이리 견고하게 자리 잡았는지...

 연세 드신 분들이 자주 오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니 일부러 자리까지 마련했던 마당에 어머니댁에 자주 방문할까 봐 걱정이라니 앞뒤도 맞지 않는 괜한 걱정에 실소가 나왔다.

 사람의 불안심리는 참 가당치도 않다.

 확실하지도 않고 딱히 근거도 없는, 속이 빈 근심 걱정 바통을 놓칠세라 꽉 움켜쥔 채  두 눈 질끈 감고 어디가 결승점 인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전력 질주할 레이스는 어디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쥐고 있는 바통이 다음 주자에게 넘겨줄 만한 것인지 정신 차리고 점검할 일이다.


 결국 자청해서 새로 이사한 집으로 어른들을 초대했다.

 남편이 아침부터 서울 근교에 사는 이모님과 숙모님을 모시고 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한 삼촌은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로 오셔서 집 근처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미리 준비한 간단한 다과상을 앞에 놓고 환담을 이어갔다.

 

 "그래 너 요즘 센터에 나간다며? 어때, 다닐만하니?"

 "아유 말도 마! 거긴 내가 안 가면 난리가 난다고!

 그림도 가르쳐야 되고 뜨개질이며 뭐든 그 할머니들이 내 도움 없이는 안되거든. 호호호"

 "오! 네가 예전부터 손재주가 얼마나 좋았니! 참 잘되었구나!

 그래, 할머니들만 나오시냐?"

 "할머니들뿐 아니라 점잖은 교수님들도 꽤 여럿 나오시는데, 아 글쎄 그 양반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자리로 쭈욱 와서는 요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자고 그러잖아? 난 그럼 또 아침에 신문 본 거를 말하지 않겠어? 역시 말이 통한다나 어쩐다나? 호호호."

 "옳거니! 네가 인기가 많구나! 하하하."

 "그럼!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00 은행 비서였다구."

 "그렇지! 네가 최고였어! 하하하 그런데 그 많던 그림은 다 어떻게 했니?"

 "아~ 그 그림은 높으신 분이 오셔서 큰 건물에 전시한다고 다 가져갔어. 뭐 이렇게 좋은 그림은 혼자 보기 아깝다나? 많은 사람이 보도록 허락해달라고 하도 그러니 할 수 없지, 내가 맘이 약하잖아 호호호."

 조건 없는 사랑이 오감으로 느껴지던 그날, 사진을 찍었다면 공기 가득 들어찬 하트까지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당신에게 초집중하여 진심 어린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정식구들에 둘러싸여 현실과 망상을 버무린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며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즐겼다.

 긴 시간 지치지 않고 쉼 없이 말씀하는 어머니도 놀라웠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이야기를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재미있게 들어주는 구순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습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다시 어린이가 되어버린 어머니에게 친정식구들은 얼마나 포근한 안식처일까..

 낯선 곳에 가면 어김없이 내 품을 파고들던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아니 나조차 어린 시절 엄마 없이 친척집에 가게 되면 밤새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머니는 새로 이사한 집이 아들네 옆이라지만 낯선 동네와 낯선 일상, 안갯속을 헤매듯 개운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불안의 레이스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독하고 무서울까. 그런데 그날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듯한 사랑의 응원에 극강의 평안을 얻은 듯했다.

 하지만 고령의 어른들이 매 순간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내가 어머니의 가이드 러너가 될 차례라는 예감에 긴장이 몰려왔다.


 예상되고도 남는 각종 허들을 무사히 넘으며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자신 없는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어머니의 친정이 든든히 진을 친 그날 그 자리엔

 '백발이 되어서도 서로 사랑하고 지지하는 힘은 이렇게 강력한 거란다. 그러니 너도 걱정 말고 그냥 무작정 덤벼봐!'라는 저항할 수 없는 주문이 빗발치듯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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