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동산에서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경험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월등히 큰 스트레스로 자잘한 스트레스를 덮어버리는 메커니즘이라는 글을 읽고
'오! 일리가 있는걸? 그러나 스트레스의 근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가 무슨 의미람? 다 부질없는 일이지 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마음 저 깊이 들어 찬 시어머니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거나 경감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홀로 사는 시어머니가 치매를 앓게 되어 나와 점점 가까운 곳에 살게 되는 만큼, 심지어 함께 살게 될 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할수록 나의 스트레스는 커지고 세졌고,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일이 0에 가까울 때조차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이고 단단히 다져졌다. 급기야 설악산 울산바위쯤은 되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며 요지부동 좁아터진 내 속을 제집처럼 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무겁고 답답하던 스트레스가 어느 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부산에 살고 있던 3살 터울의 언니가 갑자기 담도관암 4기 판정을 받은, 아마도 그날...
큰 스트레스가 작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메커니즘. 그것이 작동한 것이다.
처음에는 오진이기를 바라며 정확한 진단을 받으려고, 그다음에는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선택한 치료들을 받기 위해 언니는 의료환경이 나은 서울로 왔고 세 달여를 우리 집에 머물렀다.
어머니가 우리 아파트 옆라인으로 이사 오고 데이케어센터에 막 적응하기 시작할 즈음이었고,
아침에 차에 태워 센터로 보내드리고 늦은 오후에 돌아오시면 집에 모시고 와서 식사를 챙겨드리던 정도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수월한 상황이었는데 그땐 그 정도의 수고조차 스트레스로 여기던 때였다.
중학교 2학년이던 딸이 이모를 위해 자기 방을 내어주고 엄마아빠의 침대 옆에 요 이불을 깔고 잤다.
밤마다 잠 못 이루는 언니의 가렵고 아픈 등을 쓸어주러 왔다 갔다 하며 언니의 병세가 걱정이 되어 잠을 설치고 오전 파트타임 일을 마치고 오면 부랴부랴 무슨 요리를 해야 언니가 먹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사이 딸은 딸대로 엄마의 관심밖에서 혼자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결국 서울 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없게 된 언니는 부산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떠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딸은 수면무호흡증과 하지불안증후군, 우울감으로 인한 수면장애로 등교도 어려워지며 끝이 가늠되지 않는 터널에 들어섰다.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온몸으로 앓는 언니와 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하루를 마치고 눈을 감을 때면 그대로 눈뜨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한동안을 살아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런 내 근황은 모르고 어머니가 옆라인에 이사 와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물었다.
아 참, 어머니!
그제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간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 원인이었는데 어느새 어머니가 가까이 사는 것쯤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내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매일 고맙다고 인사하는 어머니의 미소는 사막 같은 내 마음에 꽃도 피게 할 위력을 행사하고 계시지 않은가!
살다 보니 소설보다 소설 같은 일을 제법 많이 겪게 된다.
지금도 언니의 삶과 투병과 죽음은 소설 같기만 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매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암담한 일인지...
그때 언니의 일은 메가톤급 폭발력으로 내 스트레스를 잘게 부수어 날려버렸고 나도 함께 우주로 날아가 한 점 푸른 별 지구 어느 한 귀퉁이에서 시어머니 돌보는 일로 심통을 부리던 나를 바라볼 기회를 주었다.
한심한 내가 보였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태산 같은 걱정 앞에서 시어머니가 가까이 산다는 것쯤은 모래알갱이 하나의 무게나 될까? 그것도 마음먹고 후욱 불어내면 공기너머로 흩어질, 실제로,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삶에 치중했던 질문의 무게중심을 죽음으로 옮겨 놓으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풀이도 달라진다.
때론 쉽게 답을 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끙끙대며 오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고 내 마음을 궁지로 몰아넣는 함정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실력이 꽤 향상되고 있다.
이제 차근차근 포기하지 않고 풀기만 하면 된다.
'당신을 맞이합니다'가 꽃말인 삼지닥나무꽃과 '강건'의 꽃말을 가진 떡갈나무 잎이 감싸고 있는 언니의 모습. 딸이 그린 그림을 받고 행복해하던 언니얼굴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