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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Apr 03. 2024

은갈치 축제의 글짓기왕

제주 축제 자랑 - 서귀포 은갈치 축제(1)

“글짓기왕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진지하게 언급한 ‘글짓기 왕‘이… 나?




은갈치 축제의 광고 배너를 본 나는 꽤나 힙한 비주얼에 감탄했다. 노을 지는 바닷가, 반짝거리는 은갈치는 화장품 CF 모델처럼 물방울을 튀기며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바다 거품에서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고 있었으니 그리스 물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면 제주 물거품에서는 은갈치가 탄생했다는 있지도 않은 설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배경으로는 정갈한 붓글씨로 “K-씨푸드의 자존심“, ”생선의 왕 은갈치“라고 쓰여 있는, 그러니까 어딘가 어울리지 않으면서 또 묘하게 납득이 가는 모습이라 자꾸 눈길을 끄는 배너였다.



힙한 배너에 매료되어 은갈치 축제에 대해 미리 알아보던 중 은갈치 축제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사전행사로 ‘은갈치 삼행시 짓기’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삼행시로 완패한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궁금한 분들은 서귀포 문화재 야행 편을 다시 보시길 바란다.)


이번이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즉시 노트북을 켜 챗GPT에 ‘은갈치’ 삼행시를 요구했다. 신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스러운 것이지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물론이었다.


‘은갈치’로 삼행시를 10개씩 뽑아 놓으라고 하면 요리조리 비슷한 답변을 내놓는 챗GPT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달래 가며 얻은 답변을 편집해 그럴듯한 삼행시 한 편을 뽑아냈다.


은하수 같은 빛깔로 10월의 제주를 물들이는

갈치의 풍성한 맛과 바다의 신비를 느낄 그날

치유의 시간을 선물 받는 서귀포 은갈치 축제~!


댓글을 달자마자 묘령의 여인이 댓글에 하트를 꾹 눌러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분의 인스타 프로필을 눌러 들어갔다.


‘서귀포 수협조합장 김미자’


‘아니… 이 분은?’






미자 씨로 말하자면 서귀포 수산협회 평사원에서 시작해 전국 수협 중 최초의 여성 조합장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3선에 성공한 전무후무한 인물.


우리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수협에도 “김미자 수협조합장 3선”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몇 달 동안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이번 은갈치 축제는 서귀포 수협에서 주최하는 것으로, 서귀포 수협조합장은 축제 주최 측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미자 씨의 하트를 받으니 어쩐지 삼행시 대회에서 입상 정도는 거뜬히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당첨자 발표 당시에는 내 이름을 찾지 못해 실망했으나, 우연히 은갈치 축제 당일 보고야 말았다. 배너에 큼지막하게 프린트되어 나부끼는 내 삼행시와 그 위에 적힌 ‘글짓기왕’이라는 글씨를.






뿌듯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챗GPT와 인간의 합작품을 바라보던 나는(보고 있니 GPT야…?) 삼행시 짓기에 걸려있던 상품이 무려 갈치 10미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헐레벌떡 운영요원을 찾았다.


“저… 삼행시 짓기에 참여하고 별다른 연락을 못 받았었는데 저기에 제 삼행시가 걸려있어서요. 누락되었는지 확인 부탁드려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장 끝에서부터 이름을 훑던 그는 순위가 올라갈수록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마지막, 글짓기 왕에 가서 손을 멈추곤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글짓기 왕이세요!”


네… 그러니까 그게 챗GPT와의 합작으로 이루어 낸 것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뽑아주셨으니 감사하긴 한데, 제가 바로 글짓기 왕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 하긴 생각해 보면 누가 스스로를 글짓기 왕이라고 부르겠어요.


하는 많은 생각 끝 “아…” 하고 끝을 흐리는 사이 그의 격양된 목소리가 몇 없는 주변 운영요원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가 사람들에게 정중히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글짓기 왕이시라’고 이야기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와 함께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아니 축하가 쏟아졌다.


“주소랑 핸드폰 번호 적어주세요!“


민망해하면서도 곧 집으로 배달될 갈치를 생각하며 오탈자 하나 없이 꼼꼼히 주소를 적는 사이 운영요원은 이럴게 아니라 담당자에게 알리겠다며 어딘가로 무전을 쳤다.


“글짓기 왕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 살아생전 이런 극진한 존칭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종전의 호들갑은 어디로 가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담당자에게 무전을 치는 그의 모습에 살짝 감동받고 말았다.


그 후로 은갈치 축제장을 걷는 나의 발걸음에 묘하게 힘이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곧 은갈치 축제의 진짜 왕 앞에서 겸손해지고 말았으니, 김미자 조합장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공기 반 소리 반으로 외쳤다.


“김미자 조합장이야!”


“헉… 대박 진짜 카리스마 있다.”

“범상치 않으시네”


초면에 실례지만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서 엄청난 카리스마와 강한 기운을 느낀 우리는 사자 앞의 초식동물처럼 숨을 죽였다.


그녀는 축제 주최 측을 대표해 곧 진행될 전통 줄타기 & 판소리 공연을 보기 위해 앉아 있었다. 뽀글 머리 삼춘들이 줄타기 공연장을 둘러싸고 일찍부터 앉아 있었는데, 미자 씨를 알아본 분들은 저마다 “아이고 조합장님” 하며 악수를 건넸다.


곧이어 좌중의 주목을 끌며 시작된 줄타기 공연은 예상과 달리 난항을 겪고 있었다.


축제장은 바다 쪽으로 쭉 뻗은 항구를 따라 열리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바람이 많은 제주도에서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줄타기를 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줄타기 곡예사는 죽을 둥 말 둥 하지만 한 번 건너가 보겠다며 너스레를 떨곤 줄을 한 번 건너온 뒤 다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시간을 끌었다. 줄을 타려 발을 떼었다 하면 어떻게 알고 금세 바람이 휘몰아친다며 농담을 던지고, 노래를 몇 곡 불렀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 우리 수협조합장님 자리하셨는데 저희가 노래 한 소절 들어봐야겠죠”


관객의 기대에 찬 눈빛을 유지하고자 무던히 애쓰던 그는 급기야 김미자 수협조합장에게 SOS신호를 보냈다.


서귀포 어민들에겐 유명인사인 미자 씨의 이름이 불리자 사람들은 앞뒤 안 가리고 박수를 쳤다.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켜보는 우리야 누구든 분위기를 띄워주길 바랐지만 갑작스러운 노래 요청이 당황스러울 법했다. 미자 씨는 어영부영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 대신 마이크를 쥐고 줄타기 곡예사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오늘 바람이 많이 불긴 하지만 방금 이 정도 바람에도 줄을 한 번 건너오셨죠. 다시 건너올 수 있으세요?“


미자 씨의 말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곡예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깐 당황스러워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한 번 이쪽으로 건너오시기만 하면 제가 노래 한 곡 부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아. 일방적으로 노래를 요청당한 이 불리한 상황을 협상으로 풀어내는 날카로움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진행 능력에 감탄을 하고 말았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주최 측인 서귀포 수협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행사팀을 불렀으니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해 미자 씨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줄타기 팀을 불렀는데 줄은 한 번도 타지 않고 주최 측의 노래로 때우게 된다면, 그리고 그 후에도 바람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상당히 난감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을 한 번에 정리한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침을 꼴딱 삼킨 기수는 “자 갑니다~!” 하며 줄을 건넜고, 이에 화답하듯 미자 씨는 노래를 한 곡 불렀다. 노래만 들렸다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삼춘들과 덩실덩실 호흡을 맞추면서도 너무 망가지지는 않는, 서귀포 3선 수협조합장다운 모습이었다.


책임지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다.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 덕분에 다음 순서까지 잘 진행되었고 은갈치 축제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우리는 즐거웠으니, 그날 은갈치 축제의 진정한 주인이자 왕은 김미자 수협조합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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