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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Apr 18. 2024

은갈치는 사랑을 싣고

제주 축제 자랑 - 서귀포 은갈치 축제(2)

은갈치 축제장 곳곳에서는 수산물 요리나 미니 태왁 만들기 같은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은갈치 타투 존이었다. 은붙이 못지않게 번쩍거리는 은갈치 스티커는 모두를 매료시켰고 나중에는 스티커가 동나 어린이들만 하게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팔뚝에 큼지막한 은갈치 타투 스티커를 새긴 옹과 나는 팔뚝을 내려다보며 어쩐지 범죄와의 전쟁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에 젖었다.


“여기는 우리 은갈치파 나와바린디 무신 일이여.“


기시감에 젖다 못해 은갈치 타투를 새긴 모두가 우리 조직원이라는 상황극에 심취해 되지도 않는 사투리로 말을 내뱉으며 깔깔댔다.






해녀 축제에서처럼 은갈치 축제에서도 한낮의 무대에서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는데, 해녀 삼춘들과 어업인들이 참여하는 대회라 그런지 해녀 축제와 같은 언더스테이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1번 참가자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뽀글 머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덩실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녀축제 노래자랑 때 있던 삼춘들이 그대로 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뽀글 머리들이 만드는 검은 물결의 파도가 어제 본 듯 익숙했다.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는 인기곡인지 대회 중 두 번이나 선곡되었고, 나훈아의 고장난 벽시계,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 등 처음 듣는 노래들이 축제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 노래자랑은 꽤나 본격적으로 준비한 심산인지 심사위원 소개 섹션이 있었다. MC가 소개한 서귀포 합창단 단장님, 성악가이면서 서귀포 예술의 전당 공연 기획자님은 간단한 목례로 소개를 받고는 심사 기준으로 ‘기계 점수’와 무대 매너, 관객의 호응도를 더해 평가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아니 잠깐… 노래방 기계 점수에 무대 매너, 관중의 호응도를 평가할 거면 기껏 자질을 갖춘 심사위원을 왜 데려다 놓았단 말인가. 그리고 당신들은 대체 왜 노래방 기계가 당신들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을 그리도 당연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딘가 이상한 발언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축제에는 있었다. 준비해 온 곡이 노래방 기계에 없어도 쿨하게 다른 노래로 바꿔서 진행하는 유연함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5번 참가자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양복을 쫙 빼입은 채였다. 노래자랑에 나온다고 좀 챙겨 입었는데 어떠냐며 이렇게 참여하게 되어 너무나 영광이라는 마음을 전했다.


은갈치 축제 노래자랑이지만, 전국 노래자랑에 참여하는 것 같은 태도로 진실하게 부른 김성환의 ‘인생’이라는 노래 가사가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이 가슴엔 꿈도 많았지, 내 손에 없는 내 것을 찾아 낮이나 밤이나

스쳐간 세월 아쉬워 한들 돌릴 수 없으니 남은 인생 잘해봐야지”


중년의 남성이 부르는 인생 노래가 이토록 절절한 것이었다니. 앞서 다른 분들이 부른 보릿고개도 그렇고, 벌써 반 세기는 족히 살아오셨을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깊은 순댓국 맛이 났다. 그런 맛을 노래방 기계가 알 리 없었다. 음정, 박자가 다 틀려도 진정성은 100점인 그런 노래를 말이다.


언더스테이지에는 그 순댓국 같은 공연에 어울리는 관객이 있었으니,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은색 쟁반을 플랜카드마냥 번쩍 들고 흔들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아주머니는 음식을 하다 달려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플랜카드처럼 두 손으로 쟁반을 치켜들고 열렬히 흔들기에 앞에 뭐라도 쓰여있는 줄 알았는데, 쟁반을 뒤로 돌렸을 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쟁반 그 자체라 당황스러웠다. 쟁반을 그토록 열심히 흔드는 사람을 살면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마친 후 관객의 박수가 잦아들 때쯤 MC가 참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고 수고하셨수다! 오늘 같이 온 사람 이쑤과?“


“아내!”


5번 참가자는 잠시 관중들을 훑더니 손으로 관중 속 한 곳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은쟁반의 그녀가 돌아가다 말고 무대 쪽으로 다시 돌아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그녀가 쟁반을 그토록 열렬히 흔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음식을 하다 말고 뛰어와서 자신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 쟁반이라도 휘저은 마음과, 응원을 마치고 후련히 돌아가는 마음이 그 이유였다.


또, 많은 사람들 속 아내를 단번에 찾는 마음(사실 찾지 않기가 더 힘들었겠지만)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는 마음이 그 이유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내를 부르는 5번 참가자 아저씨의 자랑스러운 목소리에, 은쟁반 그녀의 환한 웃음에 나는 순댓국을 푼 수저에 깍두기를 하나 얹은 듯한 풍족함을 느꼈다. 으른들의 깊은 사랑은 이런 맛일 테다.






음주가무의 민족 아니랄까 봐 저녁까지 이어진 노래자랑이며 공연은 어둑해질 무렵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에도 굳건했다.


특히 저녁때 진행된 은갈치 청소년 페스티벌 참여자들을 응원하러 온 가족들과 친구들의 온기가 은은하게 퍼져 가랑비를 잠시 잊게 해 주었다.


끼 있는 서귀포 청소년들에게 은갈치 축제가 등용문 역할을 해 주는 것일까.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참여한 은갈치 청소년 페스티벌에서는 귀여워 보이는 초등학생들의 춤사위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순서의 끝자락, 양나은(가명) 양이 나와 인어공주 OST, ‘저곳으로’라는 노래를 불렀다. 인어공주 속 한 장면을 그려내는 앳되고 청아한 목소리에 관객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어쩌면 저 친구가 나중에 아이유처럼 유명한 가수가 될지도 모르지. 그럼 그때 은갈치 축제가 그녀의 등용문이었다고 회자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청소년들의 무대가 끝난 후 서귀포수협 김미자 조합장과 한라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점수 집계 시간을 거쳐 청소년들에게 시상을 했다.


꿈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모두에게 부상으로 갈치 어묵이 돌아갔고,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에게는 최대 50만 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인어공주 OST를 불러 감동을 준 양나은 양도 2등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은갈치 축제 첫날을 마무리 짓고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둘째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을 때였다.


“여기 은갈치 축제 갔다 오시는 거예요?”


택시 기사 할아버지가 괜스레 던지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 손녀도 어제 거기 나가서 노래 부르고 우수상 받았어요.”


아. 이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은갈치 축제에 갔다 왔냐고 물어보셨군. 평소라면 그저 손녀를 자랑하고 싶은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어색하게 “오… 노래를 잘 부르나 보네요.“ 하고 적당히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 전날 은갈치 청소년 페스티벌 시상식까지 지켜보며 특히 인어공주 OST를 부른 친구를 눈여겨봤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샘솟아 흥분되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 그 인어공주 OST 부른 친구 맞죠? 노래 엄청 잘 부르던데요?“


“맞아요! 인어공주 노래 불렀어요. 걔네 엄마 아빠가 다 노래를 불러요. 기타 치고 노래한다고 하더니 똑같이 노래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했지. 지금은 뭐… 제주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래하고 그래요. 벌이가 좀 그래서 내가 탐탁지 않았는데, 글쎄 그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손녀가 노래를 잘한다고 하더라고.“


그러시냐고, 자랑스러우시겠다고. 정말 노래를 잘 부르더라고 맞장구쳐 주는 내 말에 기사님은 신이 나신 마음을 짐짓 감추며 말했다.


“어제 공연에 손녀 친구들이 응원하러 온다고 해서 내가 밥을 사주려고 뭘 먹고 싶냐고 했더니 마라탕인가? 그게 먹고 싶다고 하대. 그래서 돈 좀 나갔지.“


그랬다. 할아버지 손녀인 양다은 양은 노래도 잘 부르는데 교우관계도 좋아서 할아버지 지갑을 거덜낼 정도로 많은 친구들이 응원을 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이렇게 난감했다는 듯 표현하는 게 겸손하지만 어떻게든 자식 자랑을 하는 K-부모님 그 자체라 웃음이 나왔다.


대화를 나눈 잠깐 사이 할아버지가 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졌다.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10분 남짓 택시를 탔을 뿐이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 한 챕터를 엿본 것 같았다.


음악을 한다고 벌이가 마땅치 않은 자식이 탐탁지 않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똑같이 노래를 하는 연인과 사랑에 빠진 자녀의 이야기. 그러나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재능을 물려받아 태어난 손녀가 노래로 할아버지의 마음마저 녹였다는 이야기가 필름이 되어 머릿속에 절로 펼쳐졌다.


혹시나 양다은 양을 아는 누군가 나중에 이 글을 읽게 된다면 할아버지가 다은 양을 참 자랑스러워하시더라고, 그리고 깊이 사랑하시더라고 전해주시길.


누가 그러더냐고 묻는다면 제4회 은갈치 축제의 글짓기왕께서 그러더라고도. 엣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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