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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May 28. 2024

인싸들의 걷기 축제

올레걷기축제(2)

걷기가 일상인 사람들이어서인지 유독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축제였다. 율동을 한번 더 틀어달라고 보챘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걷는 중에도 인싸력은 숨겨지지 않아서 올레꾼들끼리 금방 친해지고 말을 트는 모습을 보곤 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레꾼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어머 무슨 꽃이에요?"

"예쁜 꽃!"

"언니보다 예쁘겠어?"


너스레를 떨고는 깔깔 웃는 모습을 흐뭇하게 뒤에서 바라보던 나는 그들이 흩어져 각자의 무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잖아?'


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말을 걸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쉬운 세상이다. 무표정으로 무장하고 다니는 게 일상인 요즘, 이 길을 걷는 동안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는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말을 걸어도 받아주는 따뜻한 보호막이 형성된 듯했다. 그리고 그 보호막 아래 인싸 올레꾼들은 마음껏 감춰둔 인싸력과 인간적인 따뜻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도 올레꾼들의 자연스러운 침투력에 보호막이 탁 하고 풀려버린 순간들이 있었다. 돌담 너머 심긴 정체불명의 보라색 작물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 중 지나가던 분이 "콜라비예요!" 하고 답을 준 것이다. "깎아먹으면 과일보다 맛있어요~"하고 콜라비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까지 친절히 알려주셨다.


내향형 인간 둘은 "오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웃어 보였다. 낯선 타인과의 대화가 불편한 것이기 전에 이토록 따뜻하고 친절할 수 있는 것이었지. 길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3시간쯤 걷자 점심식사 장소로 선정된 낙천리 아홉굿마을 의자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신청과 결제를 마친 사람들은 마을에서 준비한 점심 식사를 받을 수 있었고, 예약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마침 음식과 함께 팔던 막걸리가 동나기 전 하나 남은 막걸리를 구매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던 또 다른 낯선 올레꾼이 얼른 구매하라고 일러준 탓이었다. 3일째 걷기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던 그녀는 평소에 올레길을 걸으려면 자차로 이동해야 했는데 축제 기간이라 셔틀버스가 있으니 음주 올레를 즐길 수 있다며 행복해했다.



이처럼 정도 많고 흥도 많은 올레꾼들은 걷기 전에도 율동을 따라 하며 춤을 춘 것으로 모자라 점심 식사 장소에 초청받은 밴드가 ‘붉은노을‘을 부르기 시작하자 앞으로 남은 걸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급하게 자리를 떠나던 우리는 인싸 올레꾼들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에 경외감을 느끼며 떠나는 동안에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길을 걷다 마주한 또 다른 강렬한 풍경이 있었으니, 올레룩 콘테스트의 강력한 우승후보를 조우한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카드 병정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은 각자 등에 글자를 하나씩 새기고 있었다.


'걸'

'어'

'요'



올레길을 걷다 보니 세 분이서 '걸어요'라고 쓰인 옷을 맞춰 입으셨나 보다 하는 생각에 사진을 한 장 찍고 그분들을 앞질러 걸어갔다. 가다 보니 앞쪽에 방금 본 병정 옷을 입은 사람들이 또다시 아른거렸다. 뭐지, 분신술인가 싶었던 찰나 이번에는 다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만'

'길'

'꽃'

'께'

'함'


잠시 후 쉼터에서 만나 완전체가 된 그들은 '함께 꽃길만 걸어요'라고 쓰인 문장이 되어 일렬종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별도, 연령도 다른 사람들이 카드 병정 코스프레를 하고 뒤에는 글자를 하나씩 새긴 채 일렬로 걸어가게 된 사연을 묻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냐고 물으니 10여 년쯤 전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인연이 이어져 이렇게 매년 제주도에 함께 여행을 오고 있다고. 우연한 만남을 10년째 이어오며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모자라 함께 꽃길만 걷자는 메시지를 불특정 다수의 올레꾼들 모두에게 전파하는 그들이 진정한 길 위의 순례자처럼 보였다.







막바지에 다다르니 다리가 미친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게 우리뿐만은 아니었는데, 일본에서 온 몇몇 나이 지긋한 올레꾼들은 "올레올레~" 하고 한국어 올레송 일부만 계속해서 되뇌이며 비틀비틀 걸었다. 갈림길마다 사람들을 안내해 주던 안내 요원들의 멘트도 바뀌기 시작했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것에서 "거의 다 왔어요!", "앞으로 15분만 가면 돼요." 하는 목소리에 진심어린 응원이 담겼다. 


종점인 용수포구에 도착해 탁 트인 바다를 보자 "와... 해냈다!" 하는 마음에 벅차올랐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걸었지만 올레꾼들은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 시상식과 주요 행사를 마치고 여흥을 풀고 있었다. 잔디밭 옆 벤치에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 나와 달리 그들은 초청 밴드의 공연에 또다시 흥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기차놀이를 했다.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싱글벙글 웃으며 즐기는 그들은 일류 중의 일류, 인싸 중의 인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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