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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순영 Nov 17. 2024

비슈케크 인상

우당탕탕 배낭여행

몰도바를 떠나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왔다.

이번 여행 중간에 동행들과 합류해 파미르고원을 넘을 예정이다.


새벽에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나를 반긴 것은 거리의 포플러 나무였다.

중앙아시아에 오면 자주 만날 수 있는 포플러 나무는 키가 크고 나무의 몸통이 희다.

깜깜한 밤에도 나무 기둥의 흰빛이 환했다.

건물은 구소련의 영향 탓으로 볼품없이 크고 멋없는

도시 비슈케크이지만 널직 널찍한 길과 크고 작은 공원에 키 크고 잘생긴 나무를 보는 건 큰 즐거움이다.

거기에 멀리 천산산맥의 설산이 선명하게 보이기라도 하면 더할 나위 없다.


밤늦게 도착하는 동행들과 만나기 전에 혼자만의 하루가 주어졌다.

오랜만에 찾은 비슈케크는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거리를 걷는데 사방에서 공사 중이었다.

보도블록을 새로 까느라 거리는 온통 뒤집어져 있고 여기저기 대리석을 자르는 소음과 날리는 먼지로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통행을 막고 행사 준비를 하느라 그야말로 난리 법석이었다.

국립박물관 구경을 하고 저녁을 먹은 다음 행사 준비하는 것을 보러 광장을 찾았다.

8월 31일은 키르기스스탄 독립기념일이다.

독립기념일 전에 마쳐야 되는 공사들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광장에서는 공연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덕분에 슬쩍 엿본 공연은 전형적인 성격을 띠었다.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깔리고 선동에 딱 맞는 비장한 목소리의 사회자의 설명과 함께 억압과 폭정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여자의 비명소리와 남자들의 외침 소리가 들리면 총과 낫 등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승리의 행진을 하기도 한다.

두서없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사람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뜨거운 목소리의 사회자와 비장하기 그지없는 노래 때문에 보고만 있어도 없던 애국심이 새로 생겨날 지경이다.

일본군한테 고문당하는 독립운동가의 영상이 뒤에 깔리고 앞에서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연출하고 어디선가 총소리가 나면 도망치는 사람들이 뛰어오다 쓰러지고 절박한 목소리의 여자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오고 이윽고 애국가 내지는 비장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뭐 이런 내용의 행사가 되겠다.

사람들의 일차원적인 감정을 자극한다는 면에서 이런 행사는 좀 촌스럽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내용의 행사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니 낯설지 않았다마는 매우 새삼스러웠다고 할까?

어린 시절 나는 똘이장군을 보면서도 오열을 했었다.

공산당이 싫어요 포스터에 북한 사람은 언제나 늑대였다.

아직도 그런 시절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처음으로 혼자 움직인 비슈케크는 전에 온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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