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의 완벽한 순간

튀니지여행기

by 신순영


튀니지를 떠나기 전 하루를 튀니스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두가(Dougga)를 가기 위해 남겼다.

북아프리카에 남아있는 로마유적 중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곳이다.

과거 로마제국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뻗어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미 튀니스에 있는 카르타고 유적지를 돌아봤고 엘젬 원형경기장도 본 터라 두가에 있는 유적지에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먼저 튀니지를 다녀간 지인이 두가까지 가는 길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순전히 그 길의 풍경이 궁금해서 나섰다.

두가까지 가는 길은 확실히 지금까지 익숙하게 보아온 튀니지 풍경과 달랐다.

가을이어서 푸른 벌판은 볼 수 없었지만 멀리 높은 산과 올리브나무가 열 지어 심어져 있는 너른 구릉, 여기저기 초록의 향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루아지 기사는 길가에 나를 내려주고 미리 연락해서 와 있는 택시기사에게 넘겼다.

마을에 내려 택시를 타긴 해야 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길가에 내려주고 가버리면 이 택시기사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된다.

거리상 택시비는 왕복 10디나르 정도였는데 30을 불렀다.

나는 20으로 딜을 하고 대신 3시간 이상은 머물고 싶다고 했다.

11시에 도착해서 2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2시에 다시 만났을 때 점심을 먹지 못해 시내에 내려 달라고 했더니 난감해하며 튀니스로 돌아가서 먹으란다.

루아지기사와 이미 연락이 되어 있어서 그렇단다.

가만 보니 택시기사는 나를 다시 루아지기사에게 넘겨야 하는 모양이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루아지를 타고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자 이제 두가에 대해 얘기할 차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독 자기의 성향에 딱 맞춤인 곳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로였어도 나에게는 기가 막히게 좋은, 이상하게 정이 가거나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게 되는 경우이다.

또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기막힌 타이밍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날의 온도, 바람, 습도, 컨디션, 우연히 만난 인연이라든가 어떤 조건들이 딱 들어맞어 완벽한 순간을 이루는 타이밍을 경험하면 그 짜릿함은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내 여행 이력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데 오늘 그 순간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두가는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나는 높은 곳에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 전망에 산이나 들판, 숲이나 구릉이 있으며 더 좋고 너무 맑은 날 보다 하늘에 구름이 있는 날이 좋다.


오늘은 걷기에 이상적인 기온이었다.

아주 뜨거운 날의 한 낮이었으면 전혀 다름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끝은 개운하고 깔끔했다. 건조하면서 시원했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축감과 질감이 너무 좋았다.

유적지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늘의 구름이 올리브나무가 심어져 있는 너른 구릉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태양은 구름사이를 오가며 때론 구릉에 빛줄기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그림자를 만들기도 했다.

한 때의 영광이 지나간 유적지는 적당히 쓸쓸한 기운이 돌면서도 아름다웠다.

세 시간이 아니라 며칠은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아침에도 올라와보고 저녁 해 질 녘에도 올라오고 싶었다.

너른 언덕을 음악을 듣거나 사색을 하며 천천히 걸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무너진 돌 위에 앉아 세월의 무상함이나 영광의 흥망성쇠에 대해 생각에 빠지면 얼마나 좋을까?

튀니지를 다시 오게 된다면 사막 때문이 아니라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친 북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일 거다.

미리 알았다면 두가에 머무는 일정을 넣었을 텐데.

고작 3시간을 머물다 떠나면서 내 마음은 행복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두가를 기억을 안고 떠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 두가의 무너진 돌더미에서 숙제를 끝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피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