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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 씨 Aug 31. 2022

낙원에서 (1)



 저요?

 저는 낙원에 있어요. 방금 이상한 생각 했죠? 했네 했어.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낙원’에 있다고만 말하고 부연을 안 하면 많이들 오해를 하시더라고요. 클럽의 화장실이라던가 다크 웹 같은 비합법적인 경로를 쏘삭여 취득한 수상한 약물에 취해 눈깔을 희뜩 뒤집은 채 침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거나, 노스트라다무스나 마야 달력 같은 고대의 예언이 허탈하게 빗나가는 것을 전 세계가 지켜보며 밀레니엄을 맞이한 지 벌써 2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종말론이나 따위가 유효할 것이라 믿으며 전 재산은 기본이고 가족 친지 다 갖다 바치며 구원열차 티켓을 팔아 젖히는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다든가, 장기 감금 및 집중 요양 치료를 필요로 하는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레베카’나 ‘애니’와 같은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걸고 검은색 시트지를 붙여 정체를 감춘 가게에서 술과 함께 때로는 음탕한 행사를 팔기도 하는 그런 업에 종사 중인 건가 하는- 뭐 그런 오해들이요.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낙원에 있어요. 아 주소도 있다니까요?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28번지.

 그러니까, ‘낙원상가’ 요.     


 어, 모르세요? 종로 한복판에 아주 이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하얀 상가건물인데 근방에 유명한 랜드마크로는 빠이롯뜨 만년필과 탑골공원이 있지요. 1968년, ‘돌격’이라고 써 붙인 헬멧을 머리 위에 들쓴 채 밤섬 폭파와 와우 아파트 건설을 주도했던 김현옥 서울시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콜래보레이션으로 아주 신속하게 지어진 건물이에요. 그야말로 휘뚜루마뚜루였는데 같은 시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축조된 와우 아파트와는 달리 50년째 무너지지 않고 있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곤 해요. 청계천이 콘크리트로 덮이고 반세기쯤 푹 썩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서울 시민들의 열띤 축원 속에 고고의 소리를 대차게 지르며 탄생했던 서울극장이 마침내 문을 닫기까지의 그 유구장장한 종로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본 유서 깊은 건물인데 혹시 모르시나요? 제게 그 이야기를 해 주신 사장님은 낙원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형 고급 아파트로 ‘타워팰리스와 거의 같은 거다’라며 자부 넘치게 말했는데 저는 암만 봐도 타워팰리스와 비견되진 않아서 그건 그냥 듣고 말았지만.     


 알 것 같다고요? 예 예 맞아요, 거기. ‘허리우드 극장’이라는 간판을 벌서듯 바들바들 이고 서 있고요, 40년째 정무문에서 쌍절곤을 돌리고 있는 이소룡과 곧 숨질 것 같은 표정으로 입에서 독약을 흘리고 있는 로미오와 쥬리엣의 낡은 포스터가 피로한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건물이요. 옆구리에는 엔간한 유행어보다 월등히 한글 파괴적인 ‘낙원삘딍’이라는 현판이 인두 고문의 흔적처럼 새겨져 있고 근방에는 돼지머리를 끓이는 냄새와 희부윰한 수증기가 40년간 삶아진 돼지들의 원한만큼 겹겹이 쌓여있는데 그 냄새를 통행세처럼 맡지 않으면 어쩐지 출입이 불가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곳이요. 예 예. 거 왜 외국인들 놀러 와서 돼지머리에 입 맞추는 사진 꼭 한 번씩 찍고 가는. 이제 확실히 아시겠죠? 어, 와 본 적도 있다고요? 고등학교 때요? 선생님 몇 살인데요? 어유 그럼 거의 이십 년 전이겠네요. 친구들하고 기타 사러 갔다가 돈 뺏겼었다고요? 뒤져서 나오면 십 원에 한 대씩인데 만원을 꿍쳐뒀다가 걸려서 친구들과 따귀 백 대를 나눠 맞고 많이 우셨었다고요. 음... 그럴 수 있어요. 선생님 고등학교 때면 충분히 그랬을 수 있어요. 그때는 거기가 단연 호황이었으니까. 악기 좀 배워보겠다는 동네 청소년들, 전문 뮤지션들, 종교단체, 정치단체, 학교, 기업, 관공서... 하여간 소리 내는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현금 쥐고 숫제 낙원으로 모여들었으니 그만큼 이런저런 장사꾼들도 많았고 깡패들도 많았고 소매치기도 많았고 그랬었죠. 그때는 낙원상가에 음악인 전용 인력시장도 있었대요. 매일 새벽 뮤지션들이 낙원에 모여 드럼통에 불 피우고 손 녹이고 있으면, 공연 기획사 사람이 나와서 “다음 주 3일 동안 음성 고추 축제 군민 노래자랑 코너에서 기타와 건반, 드럼 연주할 사람 구합니다! 숙식제공! 페이 삼십만 원!” 하면 “저요! 키타! 키타! 트로트 가수 000이 빽반주 1년 했습니다!”, “저는 구로공단 000나이트 오부리 3년 차입니다!” 이렇게요.     


 에이 요즘은 깡패 같은 사람들 없어요. 물론 소매치기도 없고요. 사실, 그냥 아무도 없어요. 그저 우리 같은 사람들만 두목이 잡혀가고 퇴락한 조폭 사무실을 지키는 잔당처럼 남았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낙원상가가 쫄딱 망해버렸다는 건 아니에요. 물론 예전만큼 장사가 잘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망한 건 아니라고요. 발품 팔던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그런 것뿐이에요. 뭐 요즘 다 그렇지 않나요. 요즘 누가 낙원에서 악기 사고 남대문에서 구두 사고 동대문 가서 옷을 사요. 요즘은 쇼핑 앱도 잘 돼 있고 택배 기사님들을 어떻게 조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말 배송에 새벽 배송까지 다 가능해서 대형마트에도 사람이 없다던데요. 말하고 보니 사람 북적북적하고 사방에서 악기 소리가 뚱땅뚱땅 시끄럽게 울려대던 그때가 무척 그립네요.     


*     


 저는 거기서 무슨 일을 하냐고요? 낙원에서 뭐 하겠어요. 악기 팔죠. 가끔 야외 공연 현장에 장비 설치하러 나가기도 하고... 아뇨 아뇨, 사장 아니에요... 그냥 아르바이트... 뮤지션이냐고요? 어... 그런가? 아닌가? 아닌 거 같네요...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인데 자기 가게도 없고 그렇다고 예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알바라니 좀 그렇죠? 에이 아니에요, 물어보실 수도 있죠. 뭐 알고 제 비루한 현재를 굳이 까뒤집어 상처 내고 소금 뿌리려 하신 것도 아닐 텐데요. 사십 대 중반이라면 보통은 세상 어딘가에 적당히 뿌리내렸을 나이니까. 좋은 땅에 뿌리 잘 내린 사람은 엔간한 풍파에 끄떡없이 몸집 불리며 열매 풍성히 맺어 다음 세대 생산도 여럿 했을 나이니까.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랬을 테니까. 선생님처럼 물어보실 수도 있죠. 괘념치 마세요.

 물론 저도 처음부터 ‘아, 나는 나이 마흔 중반에 비정규직 알바가 되어있어야지’ 이런 목표를 세워두고 달려왔던 건 아니에요. 그럼요. 당연히 아니죠. 우리는 어떤 사람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을 거라고 상상하는 실수를 자주 하는 데 사실 아니잖아요.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꿈나무! 보이즈 비 앰비셔스! 그런 말로 한껏 부풀려 놓고는 실제로는 갖은 고초로 매질하고 싸다듬이 하며 종국에는 전혀 생각도 안 한 인생으로 몰아넣는 게 우리 사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지옥 달리 없고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그런 말들도 많이 하는 거잖아요. 노숙인들도 태어날 때부터 노숙을 꿈꾸며 살아오진 않았을 테고, 선생님도 처음부터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하려던 건 아니었을 거고요. 그 길고 어려운 공부 다 마치고 자격을 얻으셨던 그 순간에는 얼마나 꿈이 컸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지금 이곳에 있죠. 다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원치 않는 어떤 무언가가 되어있는 거지 꿈꾸는 대로,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 우리 이제 다 알잖아요. 저도 똑같아요. 사실 음악만으로 먹고사는 뮤지션이 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삶을 살다가 여기 누워있네요.     


 그래도 낙원에서 일하면 악기 실컷 만질 수 있으니 뮤지션이 꿈이라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에이 언제 적 이야기를. 말씀드렸다시피 요즘엔 매장을 찾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래서 연주를 들려주면서 악기를 소개할 일도 없어요. 그러고 보면 요즘 사람들 참 신기해요. 어떻게 악기 같은 물건을 직접 품에 안아보지도 않고 모니터만 보고 냉큼 살까요? 여하튼, 그런 이유로 지금의 낙원은 종로 그 어느 곳보다 고요한 장소가 되었죠. 아까 제가 악기를 판다고 했는데 정정할게요. 악기는 가게 홈페이지가 알아서 다 팔고요, 저는 홈페이지가 시키는 대로 먼지 쌓인 창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종일 택배 포장을 하거나 ‘악기 연주라는 게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못 해 먹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환불 사유를 주장하는 고객들을 상대하며 쌍욕을 듣는 게 제 일이에요. 휘황찬란한 연주로 혼을 쏙 빼놓은 뒤 자기가 치던 것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게 생긴 싸구려 기타를 쥐여주면서 ‘당신도 이 기타를 사기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라는, 라식 수술을 통해 앞날을 보실 수 있다는 광고만큼이나 허황된 말로 속여 판다는 이야기요? 어유, 몇십 년 전 이야기를 하시네.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엔 장사꾼과 고객이 직접 만날 일이 없어요. 사람들은 직접 악기를 연주해보고 소리를 들어보는 것보다 파워블로거나 인플루언서, 전문 리뷰어의 몇 마디 평을 더 신뢰해요. 그래서인지 사장님도 좀 변했어요. 예전에는 저희처럼 연주가 가능한 직원들을 많이 아껴주셨는데 요즘은 찬밥 신세네요. 몇 년째 악기는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창고에서 악기만 포장하는 동안 뮤지션으로서의 제 꿈도 택배 상자에 고이 포장해 누군가에게 보내버리고 말았어요. 제 꿈을 전해 받은 누군가는 꿈을 이루었을까요?     


 뮤지션은 왜 포기했냐고요? 음... 그건 이야기가 좀 긴데. 시간이 좀 남았나요? 아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요. 삼십 분쯤이요. 네 뭐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럼 이야기하는 동안만이라도 이거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에이 도망 안 가요. 제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무슨 도망을 가요. 발가벗고 있기도 하고요. 혹시 모르니 근육 이완 주사를 놓겠다고요? 그걸 맞으면 턱 근육이 풀어져서 말도 못 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똥이나 오줌을 지릴 수도 있다고요? 근데 그거 근육 이완 주사가 맞기는 한 건가요? 아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주사는 놓지 말아 주세요. 그냥 말할게요.     


*     


 저는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운동을 잘하는 것도, 돈 많은 부모가 있거나 잘생긴 것도 아닌, 그냥 여드름 많고 볼 빨갛던 중학생 소년이었어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거리에서 테이프 노점을 하는 아저씨들이 방구석에 앉아 소주를 들이켜며 한 땀 한 땀 녹음한 7월 둘째 주 핫가요 20 같은 불법 테이프나 가끔 사다 듣는 정도였지 외국 음악을 찾아 듣거나 하는 편도 아니었고요,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었고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배우고자 해도 형편이 안됐어요. 어머니가 작은 분식집을 하셔서 그걸로 먹고살았어요. 아버지는 양처럼 순하신 분이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드시는 것도 양과 비슷하셨어요.     

 어느 날 그걸 봤어요. 반 친구가 어떤 외국 밴드의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학교에 왔는데 앨범 디자인이 하도 특이해서 한참을 쳐다봤었더랬죠. 수영장 속에 아기가 있는데 낚싯줄에 걸린 1달러짜리 지폐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네네 맞아요. 들어보셨죠? 밴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이요. 아기와 돈과 낚싯줄이라니. 물에 빠진 아기의 고추가 굉장히 도드라져 있는데 그것까지 포함해 제게는 굉장히 도발적인 사진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1년도에 그 사진의 모델이었던 아기가 장성해 얼마 전 ‘나는 아동 포르노의 피해자다’라고 주장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는데 저는 이해해요. 고추가 정말 너무 많이 도드라져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아가 때라지만 그렇게 도발적으로 묘사된 내 알몸이 메가 히트 앨범에 실려 전 세계에 뿌려진다는 상상을 하자면... 하여간 이걸 만든 놈들은 뭔가 대단히 미쳤을 것 같다, 뭐 그런 느낌이 왔어요.

 그 테이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야 들어볼래? 얘네 죽어. 진짜, 정말 죽어. 저는 홀린 듯 친구의 워크맨을 집어 들었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저는 충격에 빠졌어요. 어? 이야, 씨, 이거. 타둥퉁- 타둥퉁- 탓! 하면서 기타 소리가 파도처럼 덮쳐 드는데 뇌를 아주 차가운 물에 푹 담갔다 뺀 느낌이 들었다는 거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이거 예술이다. 예술이라는 게 그런 거라면서요. 소리가 이미지로, 글이 촉감으로, 그림이 맛으로 느껴지는 그런 거요. 그런 신기한 감각 경험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이 그렇게 밤낮으로 머리 감싸 쥐고 건조해진 감각을 비틀어 짜내는 거잖아요.

 걔네들이 하는 걸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하는데요, 그게 완전히 새로운 거였거든요. 뭐 저도 나중에 찾아 들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비틀즈 같은 밴드가 록 음악의 부흥을 이끌었다가 서서히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 같은 팝 음악에 자리를 뺏기고 있었는데, 당시 주류였던 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 장르의 밴드들은 한동안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이지 못한 채 누가 더 빠른가, 누가 더 정확한가, 누가 더 높은음을 내지르는가 같은 연주 기술이라고 하기도 뭣한 진기명기에 집착하고 있었고 팝의 강세에 더하여 힙합까지 급부상하면서 록 음악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대요. 주류 록 뮤지션들이 음표를 쪼개고 쪼개는 데에 몰두하는 동안 아주 단순하고 거친 리프에 투박하면서도 파격적인 리듬을 담은 음악을 들고 그들의 엉덩이를 뻥- 차고 나타난 것이 너바나였어요. 자기 복제 포비아에 걸려 새로운 앨범을 만들지 못하고 속주 기예와 호러 분장 쇼에만 매진하던 유명 밴드들은 경악했고 너바나의 음악은 얼터너티브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죠. 래퍼 제이지도 너바나가 등장했을 때 그랬대요. ‘너바나 때문에 힙합의 부흥은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다’라고요. 굉장하죠?

 너바나의 음악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어요. 먼 나라의 청년이 지핀 불씨가 바다를 건너 제 가슴속에 날아와 화르르 옮겨 붙게 된 거죠. 불씨가 거셌던 것인지, 이미 제가 타오르기 직전의 무언가가 되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후로 몇 달 동안 너바나에 심취해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그들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와 공연 비디오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 인근 상가들을 뒤지고 다녔어요. 비디오를 구하러 왜 청계천을 가냐고요? 아 선생님 진짜 공부만 했구나. 저랑 비슷한 나이인 거 같은데, 어릴 때 청계천 안 가보셨어요? 당시 청계천 상가에는 대한민국 모든 물건의 샘플들이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잖아요. 에로 비디오는 기본이고 당시 수입이 금지되었었던 일본 만화부터 인공위성에나 쓰인다는 고밀도 집적회로, 국보급 보물, 심지어 천산갑이나 악어 같은 천연기념물도 거기서 구할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걸요. 실제로 청계천 복원 공사할 때 그 밑에서 죽은 새끼 악어가 나왔다잖아요. 여하튼 그렇게 구한 너바나의 공연 실황 비디오를 딱 틀어서 보는데 아- 첫 장면부터 아주 퇴폐적인 것이 죄짓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콩닥거리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더랬죠. 무대 위에서 막 위스키인지 보드카인지 병나발 불고 담배라기엔 모양새가 좀 허술한 것이 아무래도 담배는 아니고 뭔가 수상한 잎사귀를 말린 것 같은데 그걸 피우며 나른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기타를 부수고 드럼에 뛰어들고 그더라고요. 지금 와서 다시 보면 기타로 바닥을 내리치다가 한 번에 안 부서져서 손도 많이 아파하고 무리해서 퇴폐적인 척하는 게 너무 어설퍼서 보는 사람이 다 창피하고 그러던데 그땐 뭐가 그렇게 멋있다고 좋아했을까 싶으면서도, 그때 저는 그들을 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심과 일탈을 느껴본 거였으니까 금세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인생에서 무언갈 처음 경험했을 때 우린 아주 맹렬한 감각을 느끼곤 하잖아요. 첫 키스, 첫 섹스, 첫 담배, 처음 마셔본 소주 한 모금 뭐 그런 거요.


 너바나의 보컬이자 너바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던 커트 코베인은 1994년, 밴드 결성 7년 만에 스물일곱의 나이로 자살했어요. 일탈을 하다못해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탈주해 버린 거죠. 사람들은 그의 자살을 놓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했는데 커트 코베인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생긴 우울증 때문이다, 어릴 때 자살한 시체를 발견했고 경찰이 그걸 처리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경험 때문이다, 그 아기가 재킷 사진으로 되어있는 네버마인드 앨범이 너무 히트를 치니까 그걸 뛰어넘을 앨범을 만들 자신이 없어서다, 다양한 추측을 했었죠. 이유가 뭐가 됐든 대중들은 그가 죽자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상해요. 왜 젊어서 요절한 천재 예술가에게 유독 열광할까요. 커트 코베인, 존 레넌, 프레디 머큐리, 김광석, 김성재, 윤동주, 아쿠타가와, 제임스 딘... 열광하는 지점이 예술인지 천재인지 때 이른 요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것 같아요. 제게 처음 너바나를 들려준 반 친구가 했던 “얘네 죽어. 진짜 정말 죽어.”라는 말이 불현듯 생각나네요. 친구가 그 말을 하고 한 달 뒤에 커트 코베인이 죽었거든요. 역시 죽는다는 말 같은 거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요. 저도 오늘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죠? 저는 천재도, 예술가도 아닌데 여기서 이렇게 맥없이 요절해버리면 그건 너무 억울할 것 같은데요.     


*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였어요. 제가 만날 빗자루 들고 공연 영상을 보면서 머리 흔드는 게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줄이 두어 개 없는 기타를 주워와서는 가르쳐 주셨죠. 아버지가 기타 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칠 줄 아시더라고요? 역시 우리 아버지는 돈을 못 버는 것 빼고는 괜찮은 분이셨어요. 다만 자꾸 촌스럽게 일본 엔카 풍의 연주만 알려주길래 너바나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치고 싶다고 말하며 비디오를 보여드렸더니 기타를 들고 한동안 띵- 띵- 거리다가 “줄이 모자라서 이 곡은 칠 수 없다”라고 수줍게 말하더니 밖으로 휙 나가버리셨어요. 결국 ‘스멜스 라이크 틴 스파릿’을 치는 건 포기해야 했죠. 하는 수 없이 학교에서 줄 없는 기타로 커트 코베인의 흉내만 내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말하더라고요. 야 홍대에 가면 기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홍대 어디? 지하 클럽이 있다는데 거기서 인디 밴드들이 공연을 한대. 공연 끝나고 기다렸다가 부탁하면 알려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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