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떠나고 싶었던 서울이 눈에 아른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이삿날 편도로 끊은 KTX를 탔을 때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향수병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마치 이곳이 고향이었던 듯 잘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단한 착각이었고, 사나흘 정도 지독하게 향수병을 앓았다.
현실적인 핑계를 대자면, 아직 운전이 미숙하고 이곳의 지리가 익숙지 않아 서울을 몇 번 다녔다. 눈썹화장을 위해 예전에 가던 뷰티숍을 예약하고, 남편과 약속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나에게 익숙한 서울 병원을 골랐다. 공식적인 명분이라는 틈 사이로 서울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흘러나왔다.
고향이 생기고 나서 달라진 점 한 가지는, 낯선 땅에서 고향과 관련된 이름이나 상품을 발견하면 알 수 없는 반가움이 온몸에 퍼진다는 것이다. 하루는 평창에 놀러 온 손님들을 집에 초대했는데, 손님이 편의점에서 '서울숲'이라는 맥주를 사 왔다. '서울숲'을 보자 괜히 반갑고 기분이 좋아 다른 맥주를 뒤로 하고 서울숲을 골랐다. 대학생 때 제주에서 온 친구가 '한라산' 소주가 얼마나 맛있고 독한지 열변을 토할 때, 부산이 고향인 친구가 참이슬을 마시며 '좋은데이'가 얼마나 맛있는지 자랑할 때, 속으로 귀여워하면서 짠하게 느꼈던 그때의 기억과 지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새로운 근무 장소 발표를 하루 남기고는 몸도 너무 아프고 마음도 괴로웠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경우, 꽤나 깊고 긴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하여 나도 내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낯선 환경으로 인한 불안감과 불편함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 생각했기에, 최대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발령을 하루 앞둔 날 밤만큼은 감정을 추스르기가 많이도 힘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남편이라는 훌륭한 연고가 있을지라도, 직장에서는 혼자서 하나하나 다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막막하고 버거웠다. 이사 오기 전에도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예상했지만, 머리로 계산하는 것과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베갯잇을 꽁꽁 싸매며 애써 감추어 둔 울음이 새어 나왔고, 코가 막혀서 가위에 눌리나 하고 나를 깨우던 남편은 뜻밖의 상황에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아내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일단 토닥이고 보는 남편의 손길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서투르고 투박한 토닥질 덕분에 곤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이틀 후, 소중한 친구들의 결혼식 장소가 서울이었다. 친구들 덕분에 공식적인 명분이 생겨 또 서울행 KTX를 끊었다. 서울역에 내리자 그동안은 맡지 못했던 서울의 답답하고 탁한 공기 속에서 서울의 냄새를 찾았다. <무진기행>에 나온 주인공에게서 풍기던 서울 냄새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일정을 소화하고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아무래도 향수병이 맞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서울에 오니 벌써 평창이 그리운 것이냐며 농담을 하던 남편은, 나에게 서울이 그리운 게 아니라 오랜만에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 되었든 이사를 하고 삶의 터전을 새로 하기로 결심한 이상, 고향이 떠올라서 반갑고 그리운 감정이 들면 그 감정은 그대로 느끼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을 고향과 견주면서 고향을 지나치게 그리워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느꼈다. 솔로몬도 "어째서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가?" 하고 묻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내가 잘 적응했으면 하는 따뜻한 마음과 바람으로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다. 사실 그 과정에서 정든 곳을 떠나 온 나의 허전함과 막막함까지 공감받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정말로 이곳에 동떨어진 사람처럼 완벽하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익숙해지고 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지난주보다는 이번 주가 더 마음이 편하다.